“ㅇㅇ이는 포도를 너무 좋아해” 그러더니 벽에 있는 포도 그림의
포도를 손 가락으로 따서 쉽-쉽하고 입에 넣고 먹는 시늉을 한다.

나 같았으면 어땠을까?
“나 포도 먹고 싶어. 포도 사 줘!”
아니면 좀 부드럽게 해서
“ 포도가 먹고 싶은 데 좀 사 줄수 없어?”

그리 이른 저녁도 아니고 늦다면 늦은 밤 9시 40 분인 데 누가
포도 하나  때문에 시장  가  줄까? 십중 팔 구는
“알았어, 지금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사다 줄께”

또 자기가 비데오 보고 싶으니까
“ 우리 비데오 볼까?”
같이 비데오 보다 재미가 없으면 “ 우리 다른 비데오 볼까?”

나 같았으면
“ 우리 비데오 보자” 보다가 재미가 없으면 “ 이것 재미 없다
다른 것 보자” 아니면 약간 부드럽게
“ 이것은 재미가 없네. 다른 것 없어?” 어쨋던
상대편의 의견을 물어 보지 않고 명령조가 섞인  말을 한다.
나 뿐만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

이번 부흥회 때 박희진 목사님이 척추가 굳어지는 병으로 오랫 동안
병상 생활하신 분의 겸손을 말씀하셨다.
떨어진 종이 줏어 달라고 말씀 하실 때
“그 종이 좀 줏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말씀하셨다는
예화 설교를 하시면서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때 나는
쪼그만 것이 말하는 모양새에서 사람 마음을 감동시키게 하며.
나를 부끄럽게 하네. 나도 저렇게 지혜 있게 해야 겠다고 다짐을
하게 한 꼬마가 생각나서 속으로 픽 웃었다.

그러면 그 꼬마는 쬐그만 한 것이 이 세상에 오기 전 이미
폭- 익어서 태어 난 것인가?
이유는 그 꼬마는
(가르침 받을 만한 세월을 보낸 것도, 시간도 없을 나이 이기에)

참으로 황당하게 느껴 졌던  그 꼬마가 신동으로 여겨지고 그 꼬마
앞에 서기가  실제 약간 겁이 난다. 혹시나 내 행동에서 그 꼬마가
자기 나름대로 어떤 생각을 할까 해서.

그 꼬마는 이제 겨우 두 살을 넘긴 은원이 이다.
어떻게 두 살을 막 지난 아이가 위와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은원이의 찬양과 기도하는 모습도 사람을 감동 시키지만
상대편의 의견을 물어 보는 말과 상대의 마음을 감동 시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세련된 말과 행동은  가히 천재적이다.

“은원이는 포도를 너무 좋아해” 하면서  그림 속의 포도를 따
먹는 흉내를 쉽- 쉬입 소리까지 내면서 사람을 감동 시키는 데
아무리 늦은 밤 일지라도  포도 사러 나가지 않는 강 심장을
가진 부모는 없을 것이다.

나는 어떤 특정한 아이의 특별한 재주를 사람 앞에서 하는 것을
절대 좋아하지 않을 뿐 더러  칭찬도 않는 성격이다.
"부모가 얼마나 가르쳤으면 저 아이가 저럴까? 싶어서 이다.

그러나  은원이는 좀 특별한 것 같다. 태어 난 본성 인 것이다.

세살 아이 한테도 배울 것이 있다는 옛 속담이 하나 틀리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은원이.
정말 하늘이 주신 폭 익은 열매의 신동이라 생각 되어 진다.

부모의 책임이 무거울 것 같다.

이렇게 영특한 은원이를  생의 기업으로 주신 이유을 기도로 주님께
아뢰면서 주님 주시는 응답으로 하나님 기뻐하시는 선물이 되도록
키워 나가야 할 의무가 부모에게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