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좋을 그 사랑을 주옵소서


지난 주일, 심방을 몇 번 부탁하신 한 가정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 예배를 드리고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남편은 아내에게, 우리가 이렇게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당신이 고생한 덕분이요, 나같이 세상에서 하나님도 모르고 악하게 살던 사람을 거두어 예수님 믿게 하고, 우리 온 가족이 다 예수님 믿게 된 것도 다 당신 덕분이라고 하였다. 부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진심으로 표현하시는 걸 들으니 마음에 감동이 되었다. 아들딸을 훌륭한 성직자와 하나님의 자녀로 키우고 가난한 자와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은밀하게 충성봉사를 넘치게 하신 너무도 고맙고 감사한 분들이다. 그런데 다음날 아내인 그 자매님은 복음을 증거 하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하나님의 품으로 가셨다. 믿겨지지가 않았다. 어떻게 그렇게 갑작스럽게 가실 수가 있을까? 지금이라도 오실 것 같고 전화라도 하실 것 같다.

5년 전 대사경회 첫날, “선생님 강의하고 오겠습니다.” 하고는 강의 마치고 내려오니 선생님께서 조금 전에 소천 하셨다고 하신다. 선생님이 떠나시고 몇 년간을 넋 나간 사람처럼 방황하며 살다 겨우 맘을 추스르고 사는데, 또 이번에는 자매님이 떠나가시니 가슴이 아프다. 아직도 하얗게 눈 쌓인 금이동 뒷산을 달밤에 어슬렁거리다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긴 겨울 찬바람에 나부끼는 겨울나무 사이로 바람이 분다. 내 가슴에도 바람이 분다. 가슴이 아려 말없이 운다.
2010년 새해 올해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찐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13:23) 한 것처럼 잘 고쳐지지 않는 못된 성질과 악습, 언제까지 이렇게 이런 모양으로 믿을 작정인가? 올해는 피가 나도록 빡빡 문질러 껍데기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반점이 없어질 때까지 철저한 참회와 절제생활로 아주 죽을 각오로 일사각오의 삶을 살자. 우리는 이 세상에 결코 일분일초도 한가하게 머물 수 없는 나그네이다. 후회 없는 삶, 더 가치 있고 보람 있는 더 밝은 빛으로 익어가는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왕상18:21). 복음 정신을 과감하게 실천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마음, 별 소리를 해도 마이동풍인 마음, 전적으로 헌신하지 않으려는 마음, 한 알의 밀이 썩지 않고 언제나 한 알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는 이기주의자요 인색한 자요, 그 한 알은 더욱 굳어져 가는 한 알이요, 곰팡이 쓴 독이 오른 한 알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나빠진다는 말이다. 그렇게 언제나 죽지 않고 남아있는 것은 종교적 악독이 배는 일이다. 종교적 악인은 세상 악인보다 배나 악독하다.
죽지 않고 한 알 그대로 있는 사람이라면 올해는 어떻게 하든 썩어져 죽자. 죽어야 산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어거스틴 성인은 “하나님이여, 당신을 위하여 우리를 지으셨으니 당신 품에 되돌아갈 때까지 우리는 평안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소화 데레사는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만 태어났다고 하면서, 아름다운 꽃 하나 사랑한 것까지도 뉘우치며 “하나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고백하면서 임종했다.
올해는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훈련을 하자. K선생님 살아계실 때 “선생님, 지금까지 저희들의 살아온 형편을 들으셨으니 고쳐야 될 점이 많겠지만 그 가운데서 한 가지만 말씀해 주세요.”라고 간청했을 때 이런 교훈을 주셨다.

“글쎄요. 다들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제가 조심스럽게 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훈련들이 너무 빈약한 것 같아요.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 영성생활이고 빛 된 생활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판단하려고 해야 됩니다. 목사님 중심, 사모님 중심, 아이들 중심 아니면 수도회 회원들 중심 이런 인간적인 측면을 벗어나야 해요. 물론 그것도 너무 무시해서는 안 되지요. 왜냐면 우리는 이웃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하니까요. 이웃을 향해서 빛과 소금 역할도 해야 되고요.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먼저 하나님 눈치를 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거든요.
어떤 분이 쿨쿨 코를 골면서 잠을 자고 계시는데 예배시간이거나 기도시간이라면 그분이 고생스러울지라도 그분이 싫어하는 것 같다 할지라도 그분이 원망하고 불평할 것 같다 할지라도 깨우는 지혜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거칠게 다루어서는 손해 보는 것이니까 부드럽게 해야지요. 그런 경우에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느냐 매일같이 순간마다 걸음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라’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의 생활을 돌아봐야 합니다. 사람들이 보던 안 보던 언제든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배시간인데 잠자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조용히 지혜롭게 깨워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요. 그분이 영적으로 손해 보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할 일만 한다면 온전한 영적생활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골고루 열매 맺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어요. 어떤 생활 속에서든 분별해보면 열매 맺을 것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아씨시의 프랜시스의 일생표어는 “내 주여, 나의 전부여!”였다. 프랜시스 성인의 이야기를 수십 번 듣고, 읽고, 증거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듣고, 읽고,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프랜시스 성인처럼 그렇게 가난하게 먹고, 가난하게 자고, 가난하게 입고 살아봐야 한다. 밤낮 듣기만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가 그렇게 살아야지.
프랜시스 성인처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해보자. 올해는 좋은 옷 나눠주고, 가난하게 입고 살자. 그리고 돈 줘가면서 그 음란하고 지저분한 찜질방 가지 말자. 특히 목회자들은 사례비 받은 돈으로 찜질방 가지 말고, 비싼 옷과 좋은 음식은 취하지도 말자. 이다음에 우리 주님 뵈올 때 무슨 낯으로 뵈올꼬.
우리 주님 이 세상에 계실 때 머리 둘 곳 없이 가난하게 사시다가 가시 면류관 쓰시고, 온 몸이 피멍으로 뼈가 으스러지도록 십자가를 지고 그 가파른 골고다 길을 가셨는데, 사모님은 밍크코트, 목사님은 비싼 자가용, 몇 수 십 평짜리 아파트… 아! 두렵도다. 이 화를 어찌 면하리요. 주님을 이용하여 자기 배를 채우는 죄인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기철 목사님은 그 차디찬 콘크리트 바닥에 벼룩과 빈대가 우글거리고, 찬바람이 쌩쌩 부는 감옥 안에서 7년 동안을 일사각오의 삶을 사셨는데, 우리는 이 따뜻한 방에서 이불 깔고 베개 베고 잠을 자니 등 따습고, 배부른데 어찌 주님을 생각할꼬! 그 찬밥 한 덩이 창살에 갇혀 외로이 드시는 목사님을 생각하니 밥을 먹다가도 목이 멘다. 절제할 줄 모르는 자에게 오히려 물질의 복이 화가 될 것이다. 아! 점점 기계화 되어 가는 저 아이들, 점점 비대해져가는 교회와 성도들. “주님! 가난함을 주옵소서.”
지리산 서리 내 골짜기에서 맨발로 새벽에 내려오시는 이현필 선생님의 수염에는 고드름이 달려 있었다. 우리는 어찌 따스한 방에서 잠만 자고 있는지.
주님, 우리의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문밖에서 밤새 문을 두드리시다 손에 피가 흐르고 머리에 눈이 덮이신 주님을 생각할 때 자다가도 일어나 시퍼렇게 멍이 들 정도로 가슴을 치며 회개하게 하소서. 피눈물을 흘리며 통회하게 하소서. 침상이 눈물에 젖도록 통회자복하게 하소서. 우리가 살길은 철저하게 회개하는 길뿐. 주님! 이제는 이 더러운 옷과 같은 옛사람의 못된 행실, 못된 생각, 못된 마음 완전히 새롭게 고쳐주옵소서. 짧은 이 세상, 행복은 며칠 행복인가? 누리면 얼마나 누리며 살까? 누리면 누릴수록 번뇌만 더 할뿐 참된 행복은 안개와 같이 사라지고 마는 것을…

세상 행복 무언가? 세상 행복을 버리라, 이제 주님 말만하고, 주님 일만하고, 주님만 생각하고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과 동행하자.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일사각오로 전적으로 헌신하고 올해 새롭게 나서자. 사사로운 모든 일을 버리고 주님께 헌신하고 사랑하며 나서자! 순간순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불타는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자. 이 추운 겨울 밤. 다소곳이 무릎 꿇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며, 목에 피가 나도록 주님을 부르다가 죽어도 좋을 그 사랑으로.
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