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일이라면 얼마든지 말하겠다 

연합집회를 인도하러 간 일이 있다. 장소를 제공한 교회 목회자와 대화 중 자기는 얼마나 실패를 많이 하였는지 실패한 이야기라면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면서 게걸스럽게 웃겼다. 지금도 어떤 일에 가담하려고 하면 자기 교인들이 목사님은 일 저지르지 말고 가만히 앉아 있기나 하라.”고 한다며 아예 자기 실력을 안다고 한다. 자기의 실수나 창피당한 일들을 서슴없이 들춰내는 모습이 마치 실수제조기로 착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그의 교회는 활력이 있었고 그는 존경받는 목사였다. 언제라도 어려운 지역에 선교사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거나 패배주의자와는 전혀 다른, 단지 자기 자랑이나 성공담을 아예 땅에 묻고 살고 있을 뿐이었다. 성공과 실패는 인간이 다 갖고 살지만 어느 쪽을 또 어떤 각도에서 말하느냐에 따라서 인격과 품위가 결정되는 것 같다. 어떤 전도사는 목사 될 연한과 자격을 갖추었는데도 교인과의 거리를 가까이하기 위해 목사 안수를 받지 않았다.’는 말을 한다. 인도의 성자 선다 씽도 목사 임직을 사양하고 전도자의 위치로 일생을 주님께 헌신한 것 역시 권위 의식으로 자기를 포장하고 싶지 않은 태도일지 모른다. 반면 자기 간수를 지나치게 많이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두 달에 한 번씩 전라북도 목회자를 초청하여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고, 영적인 풍요를 나누기 위해 선교 전주 주관으로 영성세미나를 하고 있다. 사무실에서 격월로 삼천여 개의 도내 교회의 목회자를 초청하는 편지를 마련해 보내는 벅찬 수고를 해주었다.

어느 날, 초청장을 받은 분이 따지는 전화를 했다. 자기 친구가 전주에서 여 목사로 목회하는데, 왜 목사를 전도사로 써서 보냈느냐는 것이다.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도무지 이해하려는 기미는 없고 점점 살벌한 언어를 쓰면서 목사를 전도사로 아는 몰상식한 목사가 어디 있느냐는 독설을 퍼붓기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주소에 직함이 전도사로 되었기에 그대로 적었는데 최근에 목사 안수를 받은 모양이다. 그후부터는 ‘00교회 귀중으로 보냈다. 며칠된 목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금방 휴지통에 구겨 들어갈 편지 봉투도 권위가 있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만 같다. 목사님, 박사님, 사장님 그리고 회장님 우리 회장님! 대체 무슨 명예인지 우습기만 하다.

사도 바울은 만물의 찌끼가 되었다.’(고전4:13)고 했는데. 성경 중에 가장 아름다운 말은 집사(執事)이다. 일을 붙잡고 있다는 뜻이니 얼마나 알찬 단어인가. 나도 집사라고 불렀으면 좋겠다 싶어서 교인들 앞에서 이동휘 집사님!”이라고 따라 부르라고 했더니 웃기만 한다. 인격을 격하시키고 모욕하는 것으로 아는가보다. 집사보다 더 아름다운 직분 명칭은 없는데도 권사란 간판(?)을 따고자 하고 장로 되기 위해 가식적인 충성을 조작하는 직분 문화는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감독직의 기한이 지났는데도 목사보다는 감독으로 부르는 것이 더 권위가 있는지 모르겠다. 명함에 명예와 직분을 끝없이 나열하고 뽐내어야 신분 보장을 받는가보다. 명예귀신이 한국교회를 침범했는지 그것도 나는 무식해서 잘 모르겠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동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