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돌아보고, 더 알아가고, 그리고 기뻐하라

내 아름다우신 하나님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당신께서는 제 안에 계셨거늘

저는 밖에 있었고 밖에서 당신을 찾으며

당신께서 만드신 그 아름다운 피조물 속에

일그러진 저를 내 던졌던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저와 함께 계셨지만

저는 당신과 함께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부르시고 소리 지르시어

귀머거리인 제 귀를 열어주셨습니다.

또한 당신은 당신의 빛을 저에게 비추시어

제 눈의 어두움을 쫓아버리셨습니다.

당신을 목말라 합니다.

당신의 평화를 애타게 그리워합니다.

어거스틴 고백록중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라

종교개혁자 칼빈은 기독교 강요첫 장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참되며 건전한 지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며, 우리 자신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자신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자신의 생애를 진지하게 돌아볼 때에 그 가운데 함께하셨던 하나님의 섭리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되는데, 아마도 성 어거스틴이 이천 년 교회의 역사상 손꼽히는 신학자로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신학을 전개한 것은, “고백록(Confessiones)”에서 보이듯이 자신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잘 묵상하고 고백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거스틴이 말하는 자신의 방황, 즉 하나님 외에 다른 지혜와 명성을 추구하고, 또 때로는 도둑질까지 했으며, 여인과의 방탕했던 시절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정욕이라고 이름 할 수 있다. 요한일서 2:16에서 말하고 있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오늘도 동일하게 넘어지는 모습들이다. 우리는 가끔 스스로를 대단한 진보를 이룬 사람으로 평가하기도 하고, 남들보다 조금 나은 생활을 하는가 싶으면 금세 자위하기도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방황과 죄악의 모습은 사실 우리 속에 뿌리 채 남아있다. 뿌리가 있다는 것은, 언제든지 싹을 틔우고 가지를 키우며 열매를 맺힐 수 있다는 증거다. 우리가 회개의 자리에 나갈 때, 어거스틴을 죄 중에서 건지신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우리도 살리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방황하고 괴로워하는 인생인 어거스틴을 건지실 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다른 이들을 특별히 사용하셨다. 어거스틴은 지적인 고민의 답을 얻고자 마니교, 점성술, 플라톤 철학을 전전하였지만 바울서신을 읽고서야 만족함을 얻는다. 눈물로 가득한 기도 중, 아이들의 노래 소리 들어서 읽어라(tolle lege)”를 듣고 로마서 13:13-14을 읽게 되어 회심의 전기를 만나게 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채워지지 않는 갈증으로, 스스로를 돌아보아 하나님께 돌이키면 하나님은 헤매는 나를 기다리셨다가 바로 안아주신다. 여러 상황과 돕는 이들을 준비시킨 하나님은 내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신비한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그러면서 나는 하나님이다, 너를 살리고 지키고 인도하는 자라는 것을 확증하신다. 하나님께서 시간적으로는 영원까지 그리고 공간적으로는 전체 피조 세계를 계획하고 다스리고 계심을 어거스틴도 알았고, 우리도 안다. 결국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세계를 이끄시며, 지금 나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사랑은 태초부터 시간을 넘어서 이어져 온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실 앞에 , 주님, 당신은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을 받으실 만합니다.”는 찬양을 우리도 어거스틴과 함께 드리게 되는 것이다.

더 잘 알고 싶다면

우리는 괴로움이 없고 쾌락 가운데 있는 것만을 성공과 행복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살아도 전혀 지장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축복이 아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곳을 찾아 방황하며, 그릇된 길을 서성여도 아무런 괴로움도 없고, 참된 인생길에 대한 갈증도 생기지 않는다면 도리어 가장 무서운 저주 가운데 빠져 있는 것이라 해야 한다. 뭔가 특별한 진리를 알고 있고, 뭔가 잘 가고 있다는 특별한 선민의식이 내 안에 자리 잡아 오래된 화석처럼 자리하고 있다면, 그 안위와 평안은 실로 위험천만한 어두움이다.

지금 2017년 대한민국은 불안과 정죄로 얼룩져 있다. 신앙 여부에 상관없이, 많은 이들이 불안함을 누르며 누군가를 향해 불안을 전가하고 비난의 화살을 쏘아댄다. ‘그냥 살던 대로 열심히 살면 뭐 문제가 있겠나, 이 길이 최선이야. 더 좋은 길은 없어. 이 고난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고난이야.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려운거야.’ 이러한 자기 긍정과 위안은 잠시의 통증을 유보시키는 진통제는 될 수 있을지언정 진정한 해답은 될 수 없다.

나를 건지신 십자가 앞에 자신의 교만을 깊이 고백하는 가운데 모든 정답이 있고, 지금 보다 더 깊이 하나님을 알아야 우리의 길은 안전하다 할 수 있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슬픔을 통해 가르치시고, 때로는 우리를 상처를 입혀 치료하시며, 생명을 주시기 위해 죽이기도 하시기 때문이다. 더 깊이, 힘써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지금은, 그야말로 불안의 항아리를 이고 험난한 세상을 걷다가 언제 넘어질지 모르는 위태한 상황이 될 것이다.

살아가면서 저절로 한숨이 나올 때가 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내 맘대로 살아가다가 어떤 한계에 부딪혔을 때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지금보다 하나님을 더 잘 알고 있다면 미래에 대해서 이렇게 염려하지 않을 것 같고, 또 그분의 뜻을 잘 알았다면, 어처구니없는 실수도 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자주 들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분을 더 잘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늘 마음 한 편에 이 질문을 담아두고 살아야 한다. 정답은 분명하다. 나에게 말씀하시는 자리로 돌아가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나에게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 인도하심, 역사하심, 그리고 은혜. 괴롭고 답답하다면 주님께서 나를 이끌어 오신 그 길을 차분히 되돌아보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또 나를 어떻게 이끄실 지가 더 잘 보일 것이다.

내가 다시 말하노니

영혼의 갈증은 하나님을 멀리한데서 온 것이기에, 무엇을 하든지 의지의 주체가 나 자신인 이상 죄악의 곤고함과 방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의 주체는 전부 하나님이어야 한다. 거기서 갈증의 해갈은 시작된다. 성경은 아주 많은 곳에서 기뻐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기뻐할 일이 많지 않다. 흔한 예로, 시험을 잘 치르거나, 결혼을 하거나, 자신의 아이가 태어나거나, 물질이 생기거나, 직장에서 승진을 하거나, 목회자는 목회가 잘 되거나 한 후에는 기쁨이 되기도 하지만 거기까지고 그 순간뿐이다. 그 일들이 사라지고 나면 또 기쁨은 거기서 끝이다. 이는 우리가 누리는 기쁨의 이유가 매우 단순하고 육적이라는 뜻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는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 옥중 서신 중 한 부분이다. 기뻐 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 두 번이나 기뻐하라는 것은, 하나님으로 인해 세상과 나는 간데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기쁨이 이르는 날까지 우리가 할 일은, 주님으로 인해 기뻐할 용기와 담대한 믿음을 갖는 일이다.

흐뭇하고 흡족한 마음을 가짐을 우리는 행복하다, 라고 정의한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늘에 있으니 그것을 추구하고 사는 우리가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아닐까.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8)고 하신 말씀은 우리 삶의 지표가 된다. 예수님 외에는 그 무엇도 기쁨의 이유가 되지 못하는 절대적인 삶이 우리의 힘이다. 그 힘으로 우리는 오늘도 담대하며 충성스럽게 나아간다. 누구에게라도 기뻐할 이유를 말할 수 있는 은혜, 다시 말하고 또 말 할 수 있는 담대함, 우리 삶에 빼곡히 점철될 사랑고백. 그 모든 것의 주인이신 아버지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리라. 이것이 영원히 기록될 우리들의 고백록이다.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