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자리에서 부르는 노래


수도자로 처음 부르실 때,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갔다가 눈물콧물 다 쏟아내며 가슴에는 온통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조금만 더 자상하고 더 친절하게 수도자란 이런 길이라고 해주셨더라도 생고생은 안 했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든다. 수도자가 뭔지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죄인에게, 주님은 청첩장을 돌리던 날 새벽에 나를 따르라부르셨고, 얼떨결에 따라나섰다가 교회에서는 정신 나간 놈, 집에서는 미친 놈 소리 들으며 이리 쫓겨 다니고 저리 쫓겨 다니며 고생을 했다. 죄인을 수도자로 삼으실 거면 그렇다고 미리 말씀해 주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헤매지 않고 더 빨리 주님 앞으로 갔을 텐데 말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주님께서 부르신 길이 내게는 가장 맞는 좋은 길이었음을 고백한다. 이제는 주님 없이 살 수 없고 주님 없이 죽을 수도 없고, 오직 주님만이 나의 전부와 모든 것이 되었다. 이제는 그 무엇을 준다 해도 바꿀 수 없이 주님이 제일 좋다고 고백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은 수도자로 불러주신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이라고 증거하며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수도자로써 아픔을 느끼기도 했고 울기도 했다. 주위사람들에게 못이 박히도록 성화가 되어야 한다.’,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증거 했지만 정작 나는 어설프게 수도생활을 했다. 그런 나를 보고 선생님은 그렇게 해서 성인이 되기란 어림도 없습니다.’고 하셨던 기억이 있다.

철저한 수도자가 되 보려고 밤낮으로 회개하고, 준주성범 듣고 울면서 기도하고, 잠을 줄이고 식사를 절제하고 금식하면서 부단히도 애를 써 보았다. 프랜시스처럼 맨발로, 썬다 싱처럼 탁발하며 가난하게 살아보려고 해보았지만 늘 허물투성이 자신을 볼 뿐이었다. 그분들과 비슷한 곳은 한 군데도 없는 나의 모습을 보는 괴로움이 너무 컸다. 날마다 죄와 싸우느라 많이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아파했다. 그런데도 성인 될 조짐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그분들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고 너무 멀게 느껴져 괴로워했다. 주제파악도 못하고 잘못 끼어든 인생이 아닌가? 결국 남은 것은 상처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못 자국 난 주님의 발을 보았다. 그 발을 보고 엎드려 통곡하며 울었다. 그때 깨달았다. 주님이 가신 길은 끊임없는 아픔의 길이라는 것, 모든 신앙인은 아픔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은 생애 33년이 고통과 아픔의 삶이었다. 사도 바울도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노라(6:17).” 라고 했다. ‘흔적’(Stigma)이란 각인, 화인을 의미하는 말인데, 과거 노예나 신전 봉사자들의 몸에는 화인을 찍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흔적(스티그마), 상처를 자기 몸에 갖고 있다고 했다. 사도 바울의 갈망은 예수님의 고난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1:24).

예수님의 특징은 몸에 상처를 갖고 있는 것처럼, 참 그리스도인의 몸에는 아픔을 갖는 일이다. 우리에 신앙에는 아픔이 있어야 한다. 우리 몸에 예수님의 거룩한 흔적을 짊어지고 있어야 한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16:24).

성 프랜시스는 일생동안 나사렛 예수님만 본받기를 갈망해서 예수님 같이 가난하게 단벌옷에 맨발로 고난의 주님을 따랐다. 길을 걸어가면서도 울었다. 왜 그렇게 슬퍼하느냐고 물으면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고 울고 있어요.”라고 했다. 그분은 말년에 라베르나 산에 올라가 기도하다가 오상, 예수님의 성흔을 받았다. 그 성흔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 내렸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이 연속이었다.

예수님을 바로 믿느냐 못 믿느냐의 비결은 아픔이 있는 신앙이냐 아니냐에 있다.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십자가 없는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님을 일컬어 저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예수님은 아픔의 사람, 슬픔의 사람, 비애의 사람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본 받는다는 것은 그분의 아픔, 그분의 슬픔을 본받는 일이다.

평안하게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 안일하게 신앙생활 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골고다와 십자가, 주님께서 걸어가신 피 묻은 길, 땀에 젖은 아픔의 길을 따라가고 피 없이 눈물 없이 못 가는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

우리의 예배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처럼 눈물과 피 땀이 고여야 한다. 우리의 기도는 아픔이 있어야 한다.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과 아픔이 있는 기도를 해야 한다.

주기철 목사님은 예수님은 가시관을 쓰셨는데 우리는 어찌 면류관만 쓰고 행하려는가?”라고 하셨다.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을 잃고 가슴에 큰 아픔을 안은 채 나의 죽을 장소는 강단 위에서 설교하다가 죽거나 길가에서 전도하다가 죽거나 하게 하소서.” 하시며 끝내 순교하셨다. 이용도 목사님은 33세 짧은 인생을 눈물과 아픔으로 한국교회를 향해 피를 토하고 가셨다. 나의 영적 스승님은 40년 동안 단 하루도 아픔이 없는 날이 없었다. 그 아픔들을 가지고 일평생 가시밭길을 걷다가 오직 예수님을 증거 하다 하늘나라로 가셨다.

우리의 신앙에 아픔이 있는가? 우리 몸에 예수님의 흔적이 있는가?’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을 누리려면 아픔을 가져야 한다. 자기희생과 고독, 가난과 비방, 수많은 아픔들을 겪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아픔의 길을 가야 한다. 더 이상 이 세상과 마귀에게 속지 말고 스스로 아픔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뼈에 사무치도록 아픔을 느낄 때 그 속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 수 있다. 형식적 예배 속에서는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가 없다. 땅에 행복을 바라는 신앙생활은 성화되지 않는다. 주님을 온전히 닮아갈 수 없다. 거룩해질 수 없다. 신앙인들은 스스로 아픔의 길을 가는 자들이다. 세상도, 명예도, 돈도, 안락도 다 불살라버리고 오직 주님만 바라며 가는 자들이다.

사랑하는 예수님께서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말씀 하셨다.

우리는 언제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의 향기요 진리의 향기다. 우리의 영적 성화도 고통과 아픔 없이는 아름다워질 수 없다. 고난은 찬란한 보석보다 더 아름다운 성화를 이루어준다.

! 주님이 걸어가신 골고다 언덕, 충혈 된 눈과 터질듯 한 머리를 감싸 안고 이 밤이 지나면 저 예루살렘 언덕으로 달려가야 한다. 그곳에서 주님의 복음을 증거 하다 혹 아픈 머리가 터져 피가 낭자하게 흐르고 그곳에서 쓰러질지라도 주님을 증거 하다 죽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한다. 나는 여전히 작고 부족한 수도자이지만 마지막 소원은 오직 그것뿐이다.

수도자는 프랜시스나 썬다 싱처럼, 목회자는 주기철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이용도 목사님처럼, 모든 신앙인들은 또 성경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처럼, 그렇게 예수님을 품고 각자의 자리에서 불타오르는 사랑으로 살다가 주님 때문에 살고 죽는 삶을 살아야 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위험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칼이랴. 우리 삶은 주님 때문에 존재한다. 더 깊이 목숨 같은 주님을 사랑하길 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골고다의 사랑과 평화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