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있다. 살다보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는 뜻인데, 그 말이 이제 조금 이해가 된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넌 찔러도 피도 안 나올 거야.’ 라는 말을 하곤 하셨다. 어떤 이야기에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터였다. 그러면서 나는 원래 눈물도 없고 감정보다는 이성이 발달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책이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눈물짓는 어머니를 보면 감정조절을 잘 못하는 사람으로 몰아붙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때의 어머니처럼 나도 작은 낙엽이 떨어지는 것에도 의미 부여하며 눈물짓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며칠 전 너무나 쉽게 죄에 빠지는 나의 모습이 한심하고 진절머리 나는 일이 있었다. 행복은 무엇인지 더 나아가 삶과 죽음은 무엇인지를 묵상하게 되었다. 그 오묘한 경계선상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물음에 물꼬를 터줄 만한 것이 없을까 책장을 살피다가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저자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1905~1997)은 의학박사이자 철학박사이며 로고테라피 학파를 창시했다. 유대인이던 그는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겪은 죽음 속에서 자아를 성찰하고 인간 존엄성의 위대함을 몸소 체험한 후 이 책을 집필했다. 처음 익명으로 출간하려고 했던 이유도 자신이 겪은 일을 기록해 놓을 책임을 느끼며,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는 단순하지만 강한 신념 때문이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얻은 교훈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로고테라피를 소개한다. 내용이 비교적 알차고 유익했지만 나를 단번에 사로잡은 것은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라는 책의 결론 부분에 첨가된 내용이었다. 현 물질만능주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힘과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부익부 빈익빈, 직장을 구하기 어려운 젊은 청춘들. 피워보지도 못하고 좌절하는 이들에게, 혹은 살만큼 살았지만 꿈과 희망을 포기한 채 사회와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믿지 못하는 이들이 갈구하는 절실한 위로이다. 그뿐 아니라 사람마다 각자 살아온 형태와 색깔, 추구하는 것이 다르기에 겪는 비극, 자신만이 느끼는 외로움과 공허가 있다.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란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세 가지 요소인 고통, , 죽음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계속 낙관적일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삶에 대해 예스라고 대답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 말은 인간이 삶의 부정적인 요소를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창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낙관이란 비극에 직면했을 때 인간의 잠재력이 고통을 인간적인 성취와 실현으로 바꾸어 놓고, 죄로부터 자기 자신을 발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일회적인 삶에서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동기를 끌어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당신이 지금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라고 저자는 깊은 울림을 건넨다.

언 땅에서도 꽃을 피울 수 있다. 될 수 없다고 단정 짓는다 해도 언 땅을 뚫고 나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최선이 있다면 충분히 행복한 것이라고, 위로가 필요한 모든 이들에게 사랑과 진심어린 마음을 담아 전해주고 싶다.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환경과 어려움, 마음을 다 넘어서서 도우시는 하나님이 계심은 우리의 힘이다. 우리는 그분을 소유함으로 완전한 행복에 이를 수 있으니 감사하다.

허윤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