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양을 보라


우울한 성인(聖人) 없고 유쾌한 마귀 없다, 라는 라틴어 속담이 있다고 한다. 우리가 책을 통해 접한 대부분의 성자 성녀들은 끊임없이 고난 속에 자신의 삶을 담금질 했고 일부러 라도 고난 받기를 사모한 분들이다. 그런데 그들에겐 우울함이나 괴로움이 없이 오롯한 열망만이 늘 삶을 지배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인간이기 전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길 원하는 삶의 태도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고, 또 이 땅에서의 삶에 가치를 두지 않았다는 결론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광야 여정에서 느끼는 가치관과 상반된 가치관임을 다시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을 위해 사는가, 무엇이 기준이 되는가는 성자 성녀들의 삶에서 거듭 발견되는 핵심요소이다.

자아, 무너지다

요즘 뉴스는 악의 근원을 보는 듯 하다. 어린이에서 청소년, 그리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연령대 별로 그 종류도 다양하게 심각한 악의 상황들이 범죄와 연관되어 보도 되는 것을 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 범죄의 내용들도 인간의 상식과 도덕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말세지말의 현상이기도 하겠지만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질 그날, 심판의 때가 가까웠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으실지, 가끔은 두렵기도 하다. 뻔한 답과 현실을 알면서도 문득 문득 그럴 수밖에 없음은 너무나 나약한 인간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고, 또 주님의 무한하신 계획과 섭리를 볼 때마다 정말 모르겠구나 싶을 때가 있다.

모든 인간은 자기주도하에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 한다. ‘나’ 즉 자아에 대한 존재감을 상실할 때 병이 생기기도 하고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무언가에 도전하고 실행하고 실패하기를 반복하는 것이 또한 인간이라는 존재다.

미국의 정신분석학자인 칼 매닝거 박사에 따르면 ‘인체의 질병에 따른 원인은 다르지만 마음의 병은 심각성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원인은 모두 자기 인생에 대한 주도성의 결핍 때문에 발생 한다’고 했다. 여기서 생기는 병이 우울증 내지는 심각한 경우 자살이라는 극단의 선택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주도란 내가 나를 이끌어 가 보겠다는 것인데 얼마나 허망하고 교만한 일인가.

그 일을 창세 이후로 끊임없이 해오고 있지만 하나님은 번번이 그것의 근원을 잘라 버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증거로 보여주시고 무너뜨려 오셨다.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무너뜨리는 잿더미 위에서 인간은, 다시 일어서서 다른 방법으로 바벨탑을 쌓곤 했다.

하나님을 위한 고난을 받으며 그 분의 아픔에 동참하는 고난이 아니라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보려다가 당하는 매 맞음이 인간의 역사에는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벨탑으로 시작한 인간의 역사는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다.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미국 뉴욕의 110층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과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이 무너지더니, 얼마 전부터는 일본이 지진과 쓰나미로 무너지고 있다. 계속 이어지는 무너짐의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이고 우리 인간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어린양

유월절 전날, 제자들을 불러 다락방에 모으신 예수님의 마음은 보통의 인간들이라면 비참하고 참담한, 죽음과도 같은 마음이었을 순간이셨다. 죽음을 앞둔 최후의 만찬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이 하신 일은 실로 놀랍기 그지없었다. 제자들 한분 한분의 발을 친히 닦아 주시면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내리신 것이다. 누구도 십자가나 배신을 상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주님은 어린양으로 가장 비참하게 배신과 모욕, 멸시 천대를 당하시고 죽으셨다.

철저하게 인간을 위해 희생제물 즉, 어린양이 되신 예수님은 멸시하고 사랑을 소홀히 하는 자들을 위해 죽어 주셨다. 허물을 인하여 찔림을 당하셨고,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채찍에 맞으셨고, 우리는 나음을 입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 보혈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렇게 죽어주신 하나님의 어린양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이 나온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14:4~5).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그들. 처음 익은 열매,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 주님은 희생의 어린양이 되시면서 그렇게 죽어도 좋을 만큼 인간들을 사랑하셨다. 그렇게 사랑한 인간들 모두가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 되시길 바라면서.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것들을 만들고, 소유하고, 품으면서, 주님을 배반하고 이용했다. 흠투성이로 보혈을 더럽혔고 어린양이 인도하는 곳은 좁고 협착해서 싫다고 거절하기 일쑤였다. 거짓말을 하며 하나님을 능멸하고 익어지지 못해 하나님 나라와 의를 이루지 못하고 주님을 근심시키고 2000년을 살아오고 있다.

‘아, 이제는 그만’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세계 곳곳에서 도처에서 무너짐으로 들려오고 있다. 하나님의 마음이 무너지는 소리이다. 희생의 어린양이 아프게 절규하고 있다.

보라, 의지하라, 고통하라

성녀 비르짓다(Brigitta, 1303-1373)가 9살 때에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강론을 듣고 매우 큰 감명을 받고 추위에 떨면서도 십자가 앞에서 열심히 기도하였다. 그러던 중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는 소리를 생생하게 듣게 되었다. 보라! 내가 얼마나 큰 고통 속에서 심한 상처를 받았는지! 오, 주님! 누가 주님을 이렇게 못 박았습니까? 나를 멸시하고 내 사랑을 소홀히 하는 자들이 한 짓이란다. 비르짓다가 주님께 수난 당하실 때 매를 몇 번이나 맞으셨는지 물어보았더니 주님은 5480대의 매를 맞았다고 하셨다.

나를 멸시하고 소홀이 하는 자들. 그들이 누구인가. 바로 자아의 껍질을 벗지 못한 채 넓은 길을 가고 싶은 우리 모두를 말씀하시는 것이리라. 어린양 예수님께서 가셨던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은 길이었다. 누구나 꺼려하는 길이었다. 바로 고난의 길인 것이다.

프랜시스 성인은 인간적인 모욕과 고통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다.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 깨닫기 때문이다. 고통이 올 때 비로소 진정한 기쁨을 얻는 것이라고 참된 기쁨을 말씀하신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작은 고통이 자신을 겸손하게 이끌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를 하늘에 올리시는 분은 예수님이신데 예수님의 손으로 자신을 그 높은 하늘까지 올리시려면 자신은 아주 작아져야(겸손)만 쉽게 하늘나라로 올려진다고 생각하셨다. 겸손도 고통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고통의 때, 사순절이다. 그분이 당하신 처절한 시간을 기억하고 동참할 수 있어서 감사한 순간들이다. 어린양을 바라보며 의지하며 고통을 사모하는 시간들이다. 지금 내가 머물 곳은 어린양이 고통스럽게 누워계신 깜깜한 동굴 속이다. 그분과 함께 거하며 부활의 순간을 기다리는 일이 지금 내가 할 일인 것이다.

어린양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리를 보고, 그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그분과 함께 거하고 싶은 나날들을 만들어 가야 할 때이다. 무너지게 하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내 자아가 어서 무너지길 기대하는 자리로 어서 나아갈 때이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그가 나를 부르며 함께 하자 기다리신다. 함께 가자. 어서가자. 그분의 자리로. 선하신 우리 주 예수님 어린양 하나님의 자리로.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