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겸손한 삶

인간이 하나님과 맺어야 할 가장 근본적인 관계는 잃어버린 겸손을 도로 찾는 것 외에는 없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겸손을 회복시키고(신8:2-3), 또한 그 겸손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이 겸손은 예수님의 구속사업의 기초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극히 겸손한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셔서 모든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구속 사업을 성취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겸손이야말로 우리가 찬미해야 할 예수님의 첫째 성품이요 또 우리가 첫 번째로 간구해야 할 것이다.

겸손이란

겸손이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고, 자신은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깊이 느끼며,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께만 의지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기에 오직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이고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행동을 하든지 간에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즐겨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친히 자기 안에서 하실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는 정도가 크면 클수록 우리는 참으로 겸손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더욱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기를 힘쓰며, 또한 하나님과 인간 앞에서 종의 자리 외에 다른 자리를 구하지 말아야 한다. 종의 자리를 잡는 것이 내 유일한 목적이요 기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겸손은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임재하여 계시다는 표적이며 영광에 다다르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겸손을 얻기 위한 방법들

1) 자기 자신과 하나님을 아는 것

자기의 실상을 아는 지식은 겸손의 기초가 되고 뿌리가 된다. 그것이 겸손을 유지하고 길러 가는 최선의 방법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절감할 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더욱 알 수 있게 되고, 자기의 비참함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위엄성과 높은 위대성을 깨달으면서 그분 앞에 엎드리게 되는 것이다.

교회시대 탁월한 영적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더 잘 알고 더 열렬히 사랑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기를 살폈다. 성 어거스틴은 쉬지 않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항상 살아 계시고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나의 하나님이여, 나로 하여금 나를 더욱 깊이 알고 당신을 더욱 알게 하소서.”

프랜시스 성자는 밤낮으로 “오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누구시며 나는 누구입니까?”라고 기도했다. 자기를 아는 그만큼 하나님을 아는 것이기에 성령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런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를 높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높였던 것은 그만큼 자기와 하나님의 차이를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자기에게는 허물과 죄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의 죄가 추악하게 드러날수록 하나님은 더욱 거룩하신 분인 것을 알게 되었다.

2) 하나님 현존에 대한 신앙

성 암브로시우스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현존 속에 걷는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행동에 매우 효과적인 동기가 된다.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서 우리를 보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어느 누구도 그분의 뜻을 거르실만한 일은 결코 저지르지 못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눈을 떼지 않고 계시는데 내가 어떻게 그분에게서 눈을 뗄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겸손한 행동을 닦아 가는 일에 있어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신앙은 절대적이다. 하나님께서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들 자신이 정돈되고 감정과 정서도 하나님의 감화로 순화되어진다. 또한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신앙이 철저하게 되면 우리는 누구를 향해서도 무례할 수 없게 되고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신중하게 된다. 그리고 그 말과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한 뜻을 반영시켜 그것이 또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겸손한 행동의 가치는 참으로 큰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묵상

성 어거스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때문에 당하신 고통과 죽음을 날마다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만큼 우리에게 온전한 겸손을 가르쳐 주는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 주님께서 겪으신 고통과 죽음을 자주 깊이 생각하게 되면, 그것이 곧 우리의 영혼의 상처를 고쳐주고 정화시켜주며 성결케 만드는 큰 효력을 가져다준다.

완덕의 경지에 이르렀던 모든 거룩한 이들은 거의 일생 그리스도의 수난만을 생각하면서 거기까지 이르렀다. 그 안에는 이 땅에서 견줄 데 없는 뛰어난 하늘의 지식과 지혜와 능력이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본질이 하나님과 같은 분이셨으면서도 이 세상으로 내려오셔서 죄인들의 손에 잡혀 그토록 치욕스러운 죽음을 달게 받으셨다. 하나님이시면서도 자신을 죄인의 자리보다 더 낮추신 겸손, 그러기에 이 겸손은 그냥 덕에만 그치지 않고 그것 자체가 그대로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힘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겸손은 그 의미를 서로 떼어낼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우는 일에 있어서도 그분의 수난은 그 핵심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다.

4) 기도생활

겸손한 언행을 지속시켜 주는 힘은 오직 기도에 달려있다. 성 어거스틴은 기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기도보다 더 훌륭한 것이 어디 있으며 기도보다 더 유익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보다 더 드높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기도는 천국의 모든 문을 열 수 있고 하나님의 모든 보물 상자를 열어줄 수 있는 열쇠이다. 이 열쇠 하나만 있으면 천국의 모든 것을 얻지 못할 것이 없다.”

성 크리소스톰은 기도의 탁월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기도의 훌륭한 점 중에서 가장 빼어난 점은 기도하는 그 시간에 바로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그분과 더불어 교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께서 얼마나 높고 존엄스러운 영광의 자리로 우리를 부르셨는지 깊이 생각하여 보라. 여러분은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하나님과 함께 말할 수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의견을 나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때 어찌 여러분이 필요한 것을 청할 수 없겠는가? 하나님과의 교제의 존엄성과 그 유익과 가치를 도대체 어떻게 형언할 수 있단 말인가?”

성 프랜시스는 “완전하게 되기를 지향하는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기도의 은총이다. 이 은총이 없으면 누구라도 경건한 영적 진보를 바랄 수 없다. 그러나 이 은총만 가지게 되면 만사의 성취는 거기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모든 것은 기도로 시작되는 것이다. 기도가 아니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라도 기도하는 일 없이는 참된 겸손의 행동에 이를 수 없다.

겸손의 완성

겸손에 대한 이론이나 겸손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염원을 가지는 일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런 이론이나 염원에 그치고 만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실천만이 겸손한 사람이 되어지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요, 으뜸가는 수단인 것이다.

겸손은 말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얻어진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5)고 말씀하셨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행동적인 겸손의 실천은 겸손의 참된 마음을 가지는 일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성 어거스틴은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다. “실제로 남 앞에 자기 몸을 낮추어 굽히게 되면 마음속에서도 그만큼 겸손이 우러나게 되는 것이다. 겸손은 실천을 통해서만 얻어지고 그러기에 우리는 부단한 실습과 훈련을 통하여 겸손의 덕행을 연마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 겸손의 실천은 그 겸손을 배양하고 성장시키는 일에 필요한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기회를 활용하여 부지런히 겸손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