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성자가 되어라


그대 혼자만이 누릴 수 있는 편리한 시간을 찾아, 자주 하나님의 자애로심에 관해 묵상하라. 쓸데없는 독서에 시간을 허비하지마라. 위대한 성자들은 인간들과의 교제를 피하였으며, 될 수 있는 한 은밀한 중에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였다. 침묵과 잠잠함 안에서 신앙적 영혼은 스스로 발전하며 성경의 여러 가지 비밀들을 깨닫게 된다. 친구와 친지들로 부터 자신을 멀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거룩한 천사들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이끄실 것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놀라운 일을 행한다 할지라도 자기의 영혼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은 홀로 살면서 자신을 돌보는 사람보다 나을게 없다. 헛된 일은 헛된 자들에게 돌리고, 그대는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명하신 일에만 정신을 쏟으라. 밖으로 향하는 그대의 방문은 닫고 그대가 사랑하는 예수님을 부르라. 예수님과 함께 그대의 골방에 유하라. 이는 그대가 다른 어는 곳에 서도 그처럼 큰 평안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중에서

 


콘스탄틴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받아 가던 시대에 기독교는 오늘 한국의 기독교가 겪고 있는 것과 같은 물량주의, 세속적인 권력과의 결탁, 해이한 신앙의 문제, 기독교인은 늘어나지만 참된 예수의 제자는 줄어드는 영적인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외적인 순교가 지나간 시대에 영적인 순교로서의 수도적 삶에 대한 동경이 일부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수도원 운동은 번잡하고 시끄러운 세속을 떠나 홀로 은둔하거나 주님과만 보낼 수 있는 어떤 형태를 찾아가는 영성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광야, 혹은 사막은 이들이 거처하던 곳이고 이들의 신앙이 성숙, 고양되던 곳이었다. 그들은 복음을 철저히, 조건 없이 단순하게, 온전히 실천하려는 실천적 삶을 살았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제자도를 실행하려 했던 것이다.

 


사막 교부들의 교훈

초대교회 이후 세상적인 권세와 영예를 누리며 세속과 타협하는 경향을 거부하고, 그것을 악마적인 것으로 생각해서 거룩한 삶을 추구했던 “사람들이 일명 사막교부들”(Desert Fathers)로 불리어진 이들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신화(Theosis. 神化)의 추구는 초대교회 이래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가치 있는 삶이며 궁극의 목표이기도 한 까닭에 그 의미를 매번 되새길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일상적인 사회를 벗어나 고독한 사막을 찾았다. 이것이 그들의 “영성”의 첫 단계였다. 그 다음에 그들은 영적인 아버지들 밑에 들어갔다. 그 다음에 영위하는 그들의 일상생활은 곧 그들의 기도였으며, 철저하게 단순한 생활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삶은 인간 이하의 삶이 아니라 초인간적인 삶, 즉 거룩한 삶이었다.

모든 것으로부터 이탈하며 동시에 모든 것과 연합하는 삶인 것이다. 그들의 목표는 물이 지극히 잔잔하여 태양의 모습을 비칠 수 있을 만큼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 즉 헤스키아(hesychia)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 안에 거하는 것,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 곧 거룩한 삶이요 신령한 생활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는 생활이었다.

헤스키아란, 신체적·정신적·영적인 자유, 완전한 쉼의 상태를 의미한다. 영혼의 깊은 고요 속에서 하나님을 직접 얼굴을 대면하여 만나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이다.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가운데서 구원에, 헤스키아에 이를 수 있음을 인식 했다. 사막 교부들은 인간은 고독 속에서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고독을 통해 자신의 죄를 발견한 자만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서도 지치지 않고 잘 수행해 낼 수 있다는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고독은 새로운 탄생의 용광로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너무나 많은 집착과 욕망들로 인해 삶이 어지럽혀 지고 분열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이다. 그렇다고 사막 교부들처럼 사막으로 떠나서 살 수 없다. 일상 속에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어떤 조용한 장소와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동안 속아 왔던 허상을 깨닫고 본질에 눈을 떠야 할 때이다. 나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고 이웃의 참 가치를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 구원이 성화에 이를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임을 삶으로 깨우쳐야 한다.

 


얼마나 고독하십니까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떠나버린 경우에 찾아오는 감정이 Alleinsein(독거, 왕따)이며, 자기가 모든 사람들을 떠나버린 경우에 찾아오는 감정이 Einsamkeit(고독)이다. 현대인들은 고독을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안다. 경쟁과 대립, 적대와 긴장의 이익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저마다 신경이 피곤하고, 불안에 사로잡히고 결국 실패의 불안과 실업의 불안이 악몽처럼 따라 다닌다. 많은 이들과 함께 하지만 경쟁에 지친 마음은 혼자인 느낌이 든다. 그래서 망각의 조건으로 오락과 향락 혹은 누군가를 향해 갈망의 마음을 갖는다. 중독이란 단어가 현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저마다 하나씩 주어진 이유가 그것이다. 무언가에 빠지지 않으면 불안해서 살아갈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결국,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바울은 죽음에 대하여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으며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라고 사망을 비웃었다. 실로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으로 우리의 죽음을 멸하였고, 그의 부활로 영생이 있음을 몸소 증거 했다. 케에르게고올의 ‘죽음에 이르는 병’은 생의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허무와 절망과 고독을 의미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영적 존재로 자각하지 않는 모든 사람의 실존은 비록 놀랄만한 것을 성취했다 할지라도 절망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진정한 생에 희망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함께 계심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이로써 허무와 절망을 안겨주는 고독과 죽음으로부터 영생으로 전환된 것이다. 자기 존재에 대한 신념이 없을 때 자기의 존재는 정착하지 못하고 부동할 때 허무가 크게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들어가 그분과 즐기는 고독을 느끼지 못한다면 혼자여서 죽음에 이르는 정신공황에 빠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나만의 골방을 만들어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하루에도 수십 여 가지의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는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고독이니 침묵이니 하는 소리들은 너무 동떨어진 별나라 얘기일까. 하지만 영성의 흐름은 예수님시대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시대와 역사, 사람들의 사상을 다 떠나 언제나 한결같다. 예수님은 언제나 고독하셨고 또 혼자셨다. 많은 무리들과 함께 했지만 언제나 홀로 기도하고, 묵상하는 시간을 매일 가지셨다. 왜 그러셨을까. 하나님 안에 누리는 거룩한 평화가 골방에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혼자가 두려워 단체를 만들고 그 단체의 힘을 빌어 무언가를 이루어 나가는 인간의 연약함은 인정될만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만나는 나만의 골방이 없다면 그 사람의 영혼은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 있다고 봐야 한다. 모든 것으로부터 이탈하며 동시에 모든 것과의 연합이 나와 주님이 만나는 그 골방에서 이루어진다. 주님 아닌 것들을 자꾸만 떨쳐버리고 철저하게 고독하기를 원하라. 소화테레사가 만든 철저하게 작은 자로 부서지는 골방은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주님과 그녀만의 장소였다. “나는 그 어떤 사람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 열망이 24세의 그녀를 주님과 합일하게 했다. 주님 아닌 것들로부터 초월하는 고독을 사모하라. 골방에서 기다리시는 우리 주님의 거룩한 은총이, 내가 버리고, 끊고, 넘어선 것들을 가장 빛나게 해 주시리라. 주님 외에는 다 버리고 비워서 가장 외롭고 고독해진 사람은, 성자(聖子)의 길에 들어선 것임을 명심하라.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