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를 굽히신 예수님처


2인 1조로 1년에 한차례씩 가지는 탁발훈련이 있는 날이다. 2박 3일의 일정 속에 휴대폰도 돈도 없이 떠나지만,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또 어떤 일을 예비해놓고 계실까 하는 기대에 은근히 마음이 설렌다. 또 한편으로는 차량으로 2시간 30분가량 걸리는 춘천까지 걷기도 하고, 차도 얻어 타면서 전도도 하고, 일도 도와드리고 음식도 얻어먹어야 하는데 힘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자그마한 염려도 인다.

오전 9시 30분. 칠리제 길을 따라 30분 남짓을 걷다가 차를 탁발하는데, 쉽지 않다. 그러기를 얼마 후 산본까지 가는 트럭 한 대가 앞에 섰다. 산본에 도착한 후 다시 외곽으로 빠지는 차를 타기 위해 정중하게 90도로 인사를 하면서 팔을 들어보지만, 방향이 맞지 않아 번번이 실패다. 어느새 1시간이 경과되었다. ‘예수님, 도와주세요.’ 화살기도를 드렸다. 잠시 후 분당까지 가는 하얀 승용차를 만날 수 있었다.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셨다.
얼마 후 구리로 가는 외곽고속도로 갓길에서 내렸는데, 100키로가 넘는 속도로 대형 트럭들이 쌩쌩 달린다. 고속도로에 웬 배낭족? 빵빵! 클랙슨 소리에 화들짝 놀라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차를 얻어 타기 위해 다시 팔을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트럭 한 대가 옆으로 빠져나오더니만 저 만치 앞에서 섰다. “안녕하세요. 혹시 저희들 구리 쪽으로 가려고 하는데, 방향이 같으면 태워주실 수 있나요?” “저는 하남시까지만 가는데 괜찮으시다면 타세요.” 하나님께서 만날 만 한 분을 만나게 하신다고 주일을 온전히 지키고 싶은데, 일로 인해 주일성수를 제대로 지키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분이셨다. 옛날 직장 다닐 때의 경험을 그분에게 얘기하면서 “주일은 꼭 지키셔야 됩니다. 처음에는 부딪힘과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잘 이겨나가면 결국은 하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게 하실 것입니다. 믿음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다. 이런 저런 신앙적인 대화를 하다 보니 하남시 미사리 부근까지 왔다.
또다시 20분 남짓을 걸은 후 춘천으로 가는 차를 얻어 타려고 팔을 드는데, 개척교회 목사님 내외가 타고 계신 봉고차 한 대가 섰다. 뒤 좌석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 사모님께서 “요즘 청년들은 많은 것을 누리면서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는데, 청년들이(?) 참 보기 드문 일을 하네요.”라면서 말씀을 이으셨다. 교회를 처음 시작할 때는 꿈도 참 컸는데, 그것이 뜻대로 잘 안되고 지칠 때가 많다고 하셨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목사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가 다시 살펴보면서 처음 소명 받았을 때를 다시 되새겨 보자고 하셨다고 한다. 사모님의 그 말씀에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다.
얼마 후 마석에서 내려 도로변을 걷는데 또 우리 일행을 만났다. 반가움에 우리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비가 많이 내려서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도록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고개를 숙이며 팔을 계속 드는데, 차들이 그냥 지나갔다. 그러기를 얼마 후 춘천시내로 들어가시는 한 아저씨를 만났다. 그분은 어릴 때 미션스쿨을 다니셨는데, 지금은 교회를 다니지 않고 계신 분이었다. 아저씨는 친절하게도 우리를 위하여 춘천시내로 곧장 들어가시지 않고 목적지인 거두리에 있는 교회 앞에까지 태워다 주셨다. 그 반면 우리는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아저씨에게 열심히 영혼의 종착지인 천국으로 가는 길을 전하였다. 교회에서 여장을 푸는데, 시계가 오후 3시 50분을 가리키고 있다. 육체는 비록 피곤했지만, 하나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는 하루였다.
이튿날은 선한 목자 마리아 수도원을 방문 후 소양강 댐을 잠깐 들렀는데, 가뭄 탓인지 물 수위가 굉장히 낮았다. 그곳에서 돌아온 후 잠깐 묵상기도를 하고 있는데, 나의 내면의 저수지가 보이는 듯 했다. 바닥에 겨우 물기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탁발을 떠나기 전 몇 주 동안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처럼 영혼이 굉장히 메마르고 무거웠다. 문득 ‘처음 소명을 받을 때를 다시 새겨보자’고 하시던 개척교회 사모님의 말씀과 “네가 처음 사랑을 버렸노라.”라는 주님의 강한 책망도 함께 들려오는 듯 했다. 조그만 힘들어도 투정부리고, 힘든 일은 적당히 뒤로 빠지고, 자신에게 이득이 될 것 같으면 앞으로 나서는 이기적인 모습을 한 초라한 영혼이 그곳에 있었다. 희생과 고통이 따르는 십자가를 지는 삶이 부담스러웠다. 어느 듯 좁고 협착한 길 보다는 크고 화려해 보이는 넓은 길이 더 좋아 보였다. 밑거름보다는 사람들의 눈에 뜨이는 웃거름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면서 공동체의 밑거름역할을 해야 한다고 소리는 높였다.
그러던 몇 주 전 주님께서 다시 밑에서 시작할 수 있겠냐고 물어 오셨다. 나는 잠시 생각할 틈이 없이 대뜸 고개를 돌리며 주님께 반항을 하였다. ‘주님, 저 정말 싫거든요. 제 나이가 지금 몇인데요. 어떻게 다시 밑에서 시작해요. 한참 어린 후배들 앞에서 다시 시작하라고요. 어떻게 아이들 돌보면서 설거지며 청소까지 다 해요. 이제 체력도 약해서 못해요. 언제까지 어린아이들이 흘리는 콧물만 닦아주라는 거예요. 이제 작은 손수건 역할은 사양이에요. 멋진 넥타이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부드러운 스카프라도 목에 좀 둘러주셔야죠.’ 나름대로의 선한 명분을 내세우며 내 안의 명예욕을 만족시키고자 계속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썩어 문드러진 고목나무요 회칠한 무덤이었다.
그러한 나에게 주님은 다시 마음가운데 말씀하셨다. “몸은 어른이지만 영혼은 참으로 기저귀를 찬 갓난아이와 같구나! 어느 때까지 그렇게 뻣뻣하게 목만 세우고 살아가려느냐. 어린 아이들은 자신의 몸을 수그려 다른 사람들의 밑을 지나가는 것을 창피해 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른들은 자신이 성장했다고 하면서 자신의 어릴 때의 모습을 까마득히 잊어버린다.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차를 얻어 타고, 음식을 얻어먹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마음을 낮추는 것처럼, 언제나 어느 자리에서나 내려가야 한다. 손해 보지 않으려 하고, 남보다 높아지려고 하고, 고통 받지 않으려고 하고, 희생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이다.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그 일이 작든지 크든지 어떤 일을 맡길지라도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려고 애를 쓸 때 은혜가 임할 수 있다. 너의 탐욕을 버려라. 탁발은 자신을 비워내는 훈련이다. 순간순간 모든 삶이 탁발훈련을 받듯이 그러한 마음자세로 임해야 한다.”

“천국의 보화를 얻고자 하는 자는 모든 소유를 다 팔아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땅에 나그네로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리 작고 하찮게 여겨지는 일이 자신에게 주어져도 섭섭해하지 않을뿐더러 위치에 집착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충실한 일꾼으로 남는 것에 만족할 뿐이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된 자가 나의 참된 일꾼이다. 그러한 자가 천국에서 기둥과 같이 될 것이다. 겸손으로 너의 저수지 창고를 가득 채워라. 그러면 가뭄의 때에 저수지 땜을 열어 목이 갈한 심령들에게 나를 통하여 맑은 물을 공급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너 자신을 잊어라. 너는 내가 십자가 희생의 피로 산 내 것이다.”

메말라 있던 나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오! 주님, 이 가련하고 교만하고 추악한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어떠한 희생이 따르더라도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갔던 교회시대의 참된 일꾼이었던 그분들의 삶의 발자취를 저도 따라가게 하소서.”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