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할 시간


끝을 말하다
5월 23일 오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충격적인 서거소식에 나라 전체가 충격에 휩싸였다.
정치권, 경제계, 문화계, 학계, 시민단체, 네티즌 등 각계각층은 갑작스런 소식에 믿을 수 없다는 반응과 함께 충격과 비통의 심정을 나타내었고, 애도의 물결은 끊이지 않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 고향에 내려가 촌부(村夫)로서의 삶을 살며 국민적 사랑을 받아왔다. 그러나 최근 붉어진 뇌물수수사건은 그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가족과 측근 등 주변 인사들이 줄줄이 수사 대상에 올랐고 구속되거나 재판을 받았다. 도덕적이고 청렴하며 인간적이고 서민적이라 칭송받던 대통령이, 한순간에 뇌물수수 사건의 숨은 주체로 평가되는 순간들이 계속 되었다. 도덕적이고 청렴하던 이미지는 씻을 수 없는 상처로 얼룩졌고, 재임기간 이루어 놓았던 평가들 역시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나락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보다 그를 더 고통스럽게 한 것은 이 모든 불명예를 회복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밀려오는 책임감은 견디기 어려운 나락으로 몰아갔고 결국 최후의 승부수를 던지듯 모든 것에 종지부를 찍는 안타까운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는 유서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고,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며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고,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고 심정을 토로했다. 또한 “너무 슬퍼하지 마라”,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 라고 초연한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결국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놓는 죄악을 범하고 말았다.
한나라의 대통령으로 부와 명예,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그를 처참하게 무너뜨린 주범은 명예였다. 그 명예에 치명적인 손상이 오자 목숨을 끊어서라도 항거하고 싶었던 것이었으리라. 결백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가족들마저 ‘부패’라는 주홍글씨를 달았다. 더 이상의 희망은 보이지 않는 현실. 구원해줄 손길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그가 내린 결론은 죽음으로써 명예를 회복하고 이 모든 고통을 멈추는 것이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노 전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더 이상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 없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한다”고 낙담한 심경을 드러냈다.
스스로의 가치판단에 의해 국민들과 지지자들 앞에 고백한 내용이다. 버림받은 현실과 스스로를 버려야 했던 현실의 끝에서 다가온 이름은 낙망뿐이었다. 인권 변호사로 살던 시절부터 어떠한 시련에도 우뚝 일어서는 용기를 지녔던 그가 무너진 것은, 낙망 앞에서였다. 희망을 외치고 정의를 외치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던 시절의 그는, 가난하고 부족했고 낮은 자리에 있었다. 잃는 것이 두렵지 않았고, 속엣 것이 드러나면 담대하게 인정할 줄 아는 용기도 있었다. 누구에게나 정의를 말하며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가난과 부족함, 겸손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인권을 위해 싸우고 싶은 불굴의 투지와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고 싶은 젊은 소망이 끓어 넘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장 높은 자리로 올라선 그를 향해 사람들이 돌을 던졌을 때, 너무도 나약한 모습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억울함과 고통스러운 심정을 항거할 수단이 보이지 않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불안하고 우울했다.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지 않았더라면,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지 않았더라면, 부와 명예를 쌓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도전 앞에 조금 더 겸손했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랬더라면…
최고의 자리에서 갑자기 떨어져 내리는 추락은 미친 듯이 빠르고 무섭고 두려웠으리라. 모두가 등을 돌린 배신감과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는 절망감은, 단 하루를 사는 것에도 고통만을 안겨주었으리라. 그의 명예와 부와 인기와 사랑과 존경은 어디로 갔는가. 죽음과 맞바꾼 자존심은 얼마만큼 회복되고 추앙될 것인가. 사람들의 동정과 애도의 물결 속에서도 차가운 죽음으로 침묵하며 안녕만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수많은 날들, 멋지게 웃어주었던 수많은 종소리들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던가. 그 환상적인 즐거움은 이제 어디로 가버린 것인가.
세상만사 헛되고 참 헛되구나. 부귀공명 장수는 탐내지 마오. 솔로몬의 큰 영광 뜬구름 같고 우리 한 번 죽으면 일장의 춘몽.

용서받고 용서하고 싶은
노무현 전 대통령은 용서를 받고 싶었고 용서를 하고 싶어 했다. 오점을 남긴 부정을 용서받고 싶어 했고, 자신의 부정을 들추어내어 흠짐을 내고 그것을 더 크게 부각시키며 날카로운 비수를 들이대던 이들을 향해 용서를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결국, 용서받지 못하는 괴로움은 가장 극단적인 카드를 사용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 용서받고 싶은 희망을 죽음으로써 보여주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용서받는 것이 끝이 아니고, 죽음 이후의 심판이 더 두렵고 떨리는 것임을 그는 알았어야 했다.
누구가로부터 용서 받고 싶을 때는, 가시방석에서 무릎을 꿇는 고통과도 같다. 이제 그만 가시를 빼내고 편안히 앉고 싶은데, 상대방은 가시를 제거해줄 맘이 없어 보인다. 마음 한편은 늘 불안하고 사는 게 낙이 없어진다. 해결할 짐을 짊어지고 가는 여정은 날마다 뜨거운 사막이거나 어두운 미로속이다.
누군가를 용서하고 싶은데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또한 이제 지지 않는다. 열쇠를 쥐고 있는 것 같지만 왠지 부끄럽고 죄스러운 날들을 살아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향해 조그마한 자비의 구름도 뜨지 않는 괴로움은 죽을 만큼 힘에 겨운 일이다.
구름만 뜨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용서하리라 다짐을 하지만, 정작 주님께서 구름을 띄워주셔도 딴청을 부리곤 한다. 사악하고 간악한 모양으로 나름의 이유들을 들이대며 주님 앞에 거짓말쟁이가 된다. 십자가 위에서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외치시던 주님의 마음이 피와 땀으로 얼룩지는 것을 멀뚱하게 바라보며, 저는 주님과 달라요. 강요하지 마세요. 라는 패역한 말로 주님을 두 번 못 박는다. 그러고도 기도하고 예배도 드리고 주님의 일도 한다고 소리치며 나름 바쁘게 하루를 살아간다. 오호 통재라! 어느 때에나 주님의 옷자락 끝에서 그분의 향기를 나타내 볼까.
나에게 용서받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의 목소리가 하늘을 울려 내 삶을 지배한다면 내 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가 아파하며 고통 하는 소리를 주님이 들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용서받지 못해 괴로운 아픔들이 하늘을 울린다면, 나를 용서하지 않는 그 사람의 길도 막힐 수밖에 없다. 이 땅에서 끝난다면 더 이상 구차한 말들이 왜 필요할까. 우리에겐 영계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고, 그 고통은 이 땅의 괴로움과 비할 수가 없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
우리들에게 남은 이 땅의 시간은 과연 얼마나 될까. 스스로 삶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를 주님은 얼마나 더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실까. 성경적인 징조들을 들이대며 논리를 말하지 않아도 우리가 느끼는 체감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사랑할 시간이 얼마 없다. 오늘 있던 그가 내일은 없을 수 있고, 내일 다가올 희망찬 계획들이 오늘로 끝을 볼 수 도 있다. 예수님의 시체를 끌어안고 통곡하던 어머니 마리아와 같이 통곡하는 심정으로 이웃을 바라보자. 그가 나로 인해 고통하며 죽어간다면 나 또한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닐테니까 말이다. 내 곁에 남겨진 사람들을 향해 가장 자비로운 마음을 갖자. 그것이 안 된다면 불쌍히 라도 여겨보자. 죄와 싸우며 험난한 여정을 하는 너와 나 모두는 전적으로 타락하고 완전하게 부패한 가련한 인생들이다. 누구 하나 불쌍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철저한 경건의 잣대를 들이대며 누군가를 파헤치는 것은 주님이 하시도록 하자. 인간이어서 범한 부족함과 실수, 그릇 행함의 이유들 앞에서 말없는 기도와 자비를 나누어 주자. 내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만큼 이웃에게 나누어 주려면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주님만을 사랑한다면, 사람도 환경도 지나가는 구름일 뿐이다. 주님 외에 것들에 마음을 두지말자. 깊이깊이 더 내려놓자. 지나 보내자. 용서를 베풀고 용서를 받자. 똑딱똑딱! 시간이 흘러간다.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