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주어(主語)


내 인생의 주어(主語)가 되시는 하나님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창 45:4-8).

우리 모두는 하나님 또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 많다. 삶이라는 문장에서 나 자신을 주어로 놓을 때가 많다. 본문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 요셉은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애굽으로 보내셨습니다. 나를 애굽으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애굽의 치리자로 삼으셨습니다.”
요셉은 열일곱이라는 어린 나이에 기가 막히는 경험을 한다. 형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하다 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최선을 다해 주인을 섬기고 성실하게 일했는데 음탕한 여인에 의해 모함을 받아 옥살이까지 하게 된다. 이 기간이 무려 십삼 년이다. 우리야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미 지나간 사건을 성경이라는 텍스트로 보니까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은 좋겠다.’라고 말하지만 당시 상황 속으로 들어가서 요셉의 입장이 된다면 참으로 기가 막힌 환경이 아닐 수 없다. 종살이의 기한도 모르고 옥살이의 기한도 없었다. 그저 하나님이 기억하셔서 주신 꿈을 이루시기만을 마냥 기다려야 하는 인고의 삶이었다.
요셉이 그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을까. 그에게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두 가지의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하나님이 그 꿈들을 주신 것으로 믿었고 반드시 이루시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요셉을 만들었다. 어떠한 억울한 상황과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낙심치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작정하고 나아간 것이다. 그 결실이 본문의 내용이다. 형들이 와서 절을 하는 모습을 통해 그는 마침내 꿈이 이루어진 것을 보았다. 요셉은 친족에 의한 인신매매라는 충격적인 일 배후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애굽으로 보내시고 십삼 년이라는 환난 속 연단을 통해 하나님이 정하신 분량만큼 신앙이 성장한 후에, 때가 되자 하나님이 자신을 높이 세우셨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시고자 작정하셨는데 요셉 당시 상황은 민족을 이루기에 적절치 않았다. 이미 자리를 잡은 가나안 족속들의 텃세도 심했고 터전도 부족했고, 많은 사람을 먹일 식량 증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백 년이라는 기한을 정해서 가장 적절한 땅, 애굽의 고센으로 야곱의 가족을 이끄시고 거기서 민족을 이루도록 섭리하셨다. 이 계획에 쓰임 받은 것이 요셉이다. 요셉은 자신의 종 됨과 죄인 됨과 총리 됨,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형들을 용서하고 포용하고 그 가족들까지 먹여 살리기로 한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그리 하셨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그는 십삼 년 내내 분을 품고 이를 갈며 복수의 칼날만 갈다가 자멸하는 길로 빠져버리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이 고백은 참 쉬우면서도 쉽지 않은 고백이다. 내 앞에 원수가 나타났을 때 ‘저 원수 또한 하나님이 보내신 거지.’ 하면서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느 날 사업이 부도나고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하고 치명적인 병에 걸리고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는 상황에서 진정한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평안할 때는 신앙이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없다. 많이 가지고 있을 때, 부족함이 없을 때는 누구나 성인군자처럼, 믿음이 좋은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믿음 없이도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위기의 순간에 발휘된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인지 반석 위에 지은 집인지는 비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봐야 안다. 그래서 욥이 위대한 것이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고후 4:8).
이 고백을 할 수 있는 비결은 주님을 내 인생의 주어로 모시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 삶에 깊숙이 개입하셔서 천국 가는 좋은 길로 인도하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무엇에나 누구에게나 요셉처럼, 욥처럼 믿음으로 반응하고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이제는 내 인생의 주어를 바꿀 때다. 더 이상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를 내 힘으로 감당하려 하지 말고 그분께 온전히 맡기자. 자녀도, 장래도, 삶 전체도. ‘주님의 뜻이라면, 주님이 원하신다면….’
기영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