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현존 수업


사순절이 지나고 부활절도 지나갔다. 해마다 사순절이 돌아오면 여러 가지 각오와 결단을 하지만 그 결과에 만족할 때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지난 사순절에도 어김없이 많은 결단을 했었다. 그중 하나가 끊이지 않고 주님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순절이 다 지난 후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주님을 생각했는지 기억조차 없다.
왜 우리는 주님을 그렇게 기억치 못하는 것인가? 히브리서 기자는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 주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니 히브리서 기자의 부탁이 아닐지라도 그토록 주님에게 큰사랑과 큰 은혜를 받았다면 당연히 주님을 더 많이 기억해야 하지 않겠는가? 왜 그토록 주님을 기억하지 못하는지 가만 생각해보면 생활의 바쁨, 어려움, 쓸데없는 분요함 등이 그 이유인 것 같다.
목사가 되기를 원하는 젊은 신학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기를 원했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그는 여러 날 생각 끝에 산속으로 들어가 신과 일대일의 만남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적막한 산속에 들어가 은둔하며 살았다. 한 농부가 가져다주는 음식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그는 끊임없이 기도하였다. 그는 깊은 밤에도 여러 차례 일어나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하루가 가고 이틀, 삼일, 날이 갈수록 ‘이런 생활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하는 회의가 왔다. 그는 이러한 마음의 갈등을 잠재우기 위하여 마을에 살고 있는 장로를 찾아가 자신의 현재 생활을 낱낱이 이야기 하였다. 그의 고민을 듣고, 장로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엔 당신에게 식사를 갖다 주는 그 농부가 살아가는 모습을 살펴보면 어떨까요. 아마도 도움이 될 것도 같은데…”
장로의 말을 듣고 젊은 신학도는 곧 마을로 내려와 하루를 꼬박 그 농부와 지냈다. 농부는 아침 일찍 일어나 ‘주여’라고 하더니 일하러 나가서 온 종일 밭을 갈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주여’라고 짧은 기도를 한 뒤 곧 잠자리에 들었다. 농부의 생활에 실망한 신학도는 ‘무엇 때문에 장로는 나를 여기로 가라고 했는지 모르겠군’ 하며 다시 장로를 찾아갔다.
그리고 신학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 농부는 하루에 겨우 두 번 밖에는 신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장로님은 저보고 농부와 함께 생활해 보라고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장로는 이번에는 기름이 가득 들어있는 그릇을 그에게 주면서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마을을 돌고 오라고 했다. 신학도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기름이 든 그릇을 들고 장로의 집을 나섰다. 기름이 든 그릇을 들고 마을을 한 바퀴 도는 것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휠씬 힘든 일이었다. 땀을 뻘뻘 흘려 가며 단 한 방울의 기름도 흘리지 않게 열심히 마을을 돈 그는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겨우 집으로 돌아 올수가 있었다.
그에게 장로가 물었다. “이 그릇을 들고 마을까지 갔다 오는 동안 당신은 몇 번이나 신을 생각했습니까?” “사실은 기름이 흐를까봐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신학도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그의 대답에 장로는 말했다. “기름이 든 이 그릇 하나가 신을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하도록 당신을 사로잡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 농부는 아내와 자식을 돌보고, 힘든 농사일을 하면서도 하루에 두 번이나 신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순절과 상관없이 생활의 바쁨과 쫓김, 분요함과 어려움 등과 상관없이 계속 주님을 생각하며 살면 얼마나 좋을까?
로렌스 수사는 그의 후반 생 40년간을 ‘하나님 현존의 수업’에 자기를 바쳤다. 그의 말대로라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침묵의 평화 속에서 지냈다. 이 현존수업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특별한 은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수업을 위한 그의 충실한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는 이 실천에 익숙해지기 위해 긴 세월을 노력했다. 처음엔 너무나 어려움을 겪었다. 잡념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온갖 부질없는 생각이 억세게 마음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는 결코 덤비지 않고 언제나 중용을 지켜 가장 마음을 산란케 하는 용무 중에서도 정신을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애썼다. 이러한 오랜 시련과 수업 속에서 그는 놀라운 인격으로 변화되었다.
단순하고 솔직하여 본질적인 것에로 똑바로 가는 초자연적인 상식이 생겨났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 속에서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는 숨은 생활을 하려고 힘썼다. 그에게는 한 가지 원 밖에 없었다. 그것은 주님의 사랑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통이라도 달게 참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끊임없이 현존수업을 했던 그의 사랑의 신비주의는 다음 말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께 관한 온갖 아름다운 설교를 듣거나 글을 읽고 그것에서 느끼는 것으로 나는 만족할 수 없다. 완덕에 있어서 무한하신 하나님을 언어로서는 표현할 수 없고, 하나님의 위대성에 대한 관념을 내게 완전히 줄 수 있는 힘차고 넉넉한 언어는 없다. 그러므로 내게 하나님을 나타내시고 계시는 그대로의 그분을 인식케 하는 것이 신앙이다. 나는 하나님께 대하여 이 방법으로써 학교 같은데서 수년을 거쳐 배운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짧은 시간에 배운다.”
그는 이 지상에서 마치 하나님과 단 둘만이 있는 것처럼 살려고 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현존을 생각했고, 만사를 통해 하나님과의 사랑의 담화를 추구했다.
설교자라는 이유로 너무나 바쁜, 그래서 하나님을 생각지 못하는 우리에게 로렌스는 의미 있는 말을 던진다. “만일 제가 설교자였더라면 저는 아마 하나님의 현존수업 밖에 다른 것은 설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안드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