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인생


자주 들여다보지 않고,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지 않은 것은 버렸는데도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과 컴퓨터 등 짐을 싸니 사무실 한 가득이다. 평소에 일로 몸이 단련이 안 되었던지라 이삿짐을 이틀 동안 싸고 나니 팔다리, 어깨가 욱신거린다. 목요일 이사 날짜가 잡혀 있는데, 조금 겁이 났다. 빨리 시간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드디어 목요일 몇몇 분과 신문사로 봉고차를 타고 갔다. 약속시간보다는 조금 늦은 시간이었다. 이삿짐을 엘리베이터로 나르는데, S전도사님은 붕붕 나른다. 어디서 힘이 나오는지 책 한 묶음 나르는데도 끙끙거리는 나와는 달리 재빨리 짐을 옮기신다. 옆에 계신 사모님께서 “너무 무리 하지 마세요. 그러다가 허리 다쳐요.” 하신다. 자신의 일처럼 열심히 하시는 S전도사님의 모습이 참 아름답다.
한 참 이사 짐을 나르고 나니 12시가 약간 지났다. 이사할 장소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 계단으로 짐들을 날랐다. 마치 작은 개미 군단처럼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짐을 나르는 목사님들, 전도사님들, 집사님들의 모습이 너무나 귀하게 느껴진다. 조금이라도 수고를 덜어주려고 낡은 책장에 책까지 열심히 꽂아 주신다.

몇 차례 신문사가 이전을 하였지만, 이번은 오랜 기간 경치가 아름답고 햇빛이 잘 들어오는 장소에 있었다. 너무 안일함속에서 묻혀 빛과 순수함을 잃어 가는 신문사를 다시 깨우기 위함이었을까. 주님은 또다시 다른 장소로 옮기길 원하셨다. 여러 가지 환경과 조건과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이사를 해야 한다고 열심히 소리를 높였건만, 마음 한편은 그냥 머물고 싶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도 해야 하고, 사람들의 마음도 살펴야 하고 내심 마음이 무거웠다.
이사를 앞두고 몇 주 동안 영적 스승님의 생각이 유난히 많이 났다. 이 땅에서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굳어버린 병든 육체만 가지셨건만 40년 동안 가시밭길을 걷게 하신 그 하나님은 너무나 좋으신 분이라고 고백하셨던 선생님이셨다. 언제나 이 땅에서 하늘만 바라보며 나그네 인생을 사셨던 선생님, 육신의 장막을 벗어 버리고 본향인 천국에 다다랐을 때 그 기쁨 얼마나 크셨을까.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40년 광야생활을 하면서 거의 일년에 한 번씩 이사를 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 척박한 광야에서 모래 바람을 맞으며 짐을 풀었다 샀다를 반복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으리라. 때로는 짐을 푼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구름기둥이 떠오를 때는 얼마나 마음이 버거웠을까.
그러한 고달픈 광야의 나그네 인생이 싫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원망불평을 하던 그들이었지만, 가나안땅에 가까울수록 나그네 인생이 무엇인지 단단히 배웠으리라. 물질뿐만 아니라 마귀적이고 세상적이고 정욕적인 모든 내면의 소유까지 버려야만 광야 길을 걸어갈 수 있음을. 40년의 긴 광야생활을 통하여 60만 명이 서서히 죽어가고, 새로운 60만 명이 태어날 때까지 그들은 뼈저린 죽음의 고통 속에서 느꼈으리라. 언제나 모든 것을 버리고 곧 떠날 준비가 된 나그네 이어야만 광야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음을 그들은 눈으로 보고, 몸으로 익혔으리라.
영문 밖, 광야 무인지경으로 버려진 예수님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돌팔매질을 맞으며,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벌거숭이로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았던가. 광야의 길로 들어선 모든 이들은 어느 누구나 이 땅에서 나그네 인생을 살아야 하리라.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이 땅에서 나그네와 같이 살아야하건만 나는 여전히 인간의 정과 자신의 틀에 묶여서, 조그마한 불편함도 참지 못하고 육신의 안락함에 발이 묶여서, 나그네 인생으로 살아가는 것을 힘겨워하고 있다. 너무나 가진 게 많아서 나그네 인생이 부담스럽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곧장 짐을 싸야 하는데, 입이 한 대발 나올 때가 얼마나 많은가. 본향을 그리워하기보다는 점점 이 땅에 머물려고 하는 강한 정욕이 나의 영혼을 옭아매고 있다. 영혼은 점점 말라가건만, 육신의 얼굴은 살이 올라 점점 통통해지고 허리도 점점 굵어지고 있다.
긴 광야생활이 지루하고 지겹고 무미건조하지 않냐? 조금은 고삐를 늦추어도 되지 않냐? 지금까지 힘겹게 달려오지 않았냐? 이 정도 쯤은 괜찮을 거야. 육신도 어느 정도 돌보아야 되지 않냐? 선한 명분 속에 절제 생활이 무너지고, 구석구석에 숨겨진 먼지를 은근슬쩍 교묘하게 숨기고 적당히 회개생활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마귀가 먼저 알고 있다. 무너진 영성생활을 틈 타 육체의 정욕들이 벌떼처럼 달려들고 있다.

103세 할머니의 나그네 인생 속에 묻어난 향기
아침 식탁에서 돼지처럼 음식을 탐하며 육신의 냄새를 풍기고 있는 나와는 달리 한쪽 화분에 꽂혀진 라일락 꽃향기가 진하다. 새삼 며칠 전 평생 동정을 지키며 103세의 나이로 동광원에서 생을 마감하셨던 박금남 수녀님의 향기에 나의 초라한 삶이 다시 상기된다.
만나는 사람마다 손을 붙잡고 “사람은 순결하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은 깨끗하게 살아야 됩니다. 예수님 잘 믿으셔요.”라고 전도를 하셨던 수녀님, “주님께서 옷 두벌 있는 자는 나누어 주라 하셨지. 내겐 이 옷이면 족해요. 감사뿐입니다. 감사, 감사!”라고 하시면서 사계절 옷 한 벌로 만족하셨던 수녀님, “죄인이 어떻게 따뜻한 내의를 입을 수 있어”하시면서 내의 한 벌 없이 한 벌의 신발도 사치로 여기셨던 수녀님, 맨 바닥에 허리를 대고 새우잠을 청하면서도 “주님은 마구간에서 산에서 기거하셨는데, 나는 너무나 부를 누리고 살아!”라면서 계속 감사만 하셨다.
“103년 동안 너무 많이 먹었으니 무슨 미련이 있어. 하나님 나라 갈 때에는 깨끗하게 가야지.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으로 가지 않아! 깨끗함으로 가는 곳이야.”라면서 음식을 드시지 않으시고 냉수만 마시면서 22일 동안 굶주림과 기도로 씨름하시면서 죽음을 준비하셨던 박금남 수녀님의 이야기를 듣고 제 삶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쥐구멍으로 숨고 싶었다.
그동안 ‘나는 그래도 청년이야!’라고 스스로 뽐내며 영적교만으로 가득하였던 저의 초라한 영혼은 정말 그분의 삶의 향기 앞에서 몰둘 바를 몰랐다. 나는 정말 너무나도 작은 아이였다. 아직도 광야의 길, 주님이 걸어가셨던 영문 밖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너무나도 버려야 할 게 많음을. 아직도 수많은 고통과 쓰라림을 겪어야 함을. 나에게 박금남 수녀님은 지식이 아닌 삶으로 말씀하고 계셨다.
주님이 손짓하고 계시다. 정욕을 십자가에 철저히 못 박으면서 나그네 인생을 살라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허리띠를 졸라 매야겠다.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