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의 지혜를 배우라
어느 목사님이 강의 중, 함께 자라온 친동생에게 존경받기는 쉽지 않다는 표현을 하면서 동생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내용의 고백을 하셨다. 동생이 자신에게 잘 하는 말이 “목사님은 똑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목사님들이 말은 똑 부러지게 잘하지만 정이 안 가고, 말과 행실이 일치하지 않는 모습으로 인해 적잖은 실망감과 거부감을 준다는 뜻에서 한 핀잔이었다.
'예수 믿는 사람들 말로 당할 수 있나?'하는 비난은 대체로 ‘똑똑이’, ‘땍땍이’로 끝난 결과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똑똑하다는 소리를 좋아하고 가르치기를 좋아하고, 다른 이의 말을 존중해서 듣기를 원치 않는다. 자칭 똑똑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곳에는 시끄럽고 다툼이 많다. 서로 똑똑하다며 자기주장을 관철시켜서 이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설교도 잘 비평하고, 교회가 할 일에 대하여 그리도 잘 꿰뚫고 있지만 예전처럼 수걱수걱 순종하면서 희생하는 그리스도인은 왜 만나보기가 어려운 것일까? 약삭빠르고, 톡톡 튀는 재간둥이들은 많지만 자신의 은사들을 수줍음으로 가리며 겸손하게 실행하는 그런 아름다운 그리스도인들은 왜 만나보기 어려운 것일까? 다양한 성경공부와 별의별 훈련 프로그램은 많지만, 왜 다툼과 분열의 소식은 점점 증가하는 것일까?
요즘 내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예전의 풋풋하고 순수한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남을 가르치려는 어투가 너무나 자연스럽고, 자기희생보다는 어느새 칭찬을 즐기며 교만의 탑을 높이 쌓아가고 있다. 나이와 연륜은 조금씩 늘어가지만 겸손히 고개를 숙이기보다는 연수를 은근히 자랑하며 목을 꼿꼿이 세우고 있다. 말과 논리로 상대방을 이기려 하고, 조금이라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자존심을 내세운다.
많이 배우수록, 똑똑해질수록 손해를 안 보려하는가. 왜 많이 알면 알수록, 연륜이 깊어질수록 조금만 자존심이 상해도 견디기 어려워하는가. 치명적인 것도 아닌데 왜 똑똑해질수록 조그마한 것도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일까. 왜 학문을 익히면 익힐수록 말의 달변가는 되지만, 삶의 달변가와는 거리가 먼 것일까.
가난하지만 누구보다도 슬기로우셨던 프랜시스의 단순한 삶은 그래서 우리에게 더 깊은 울림이 된다. 예수님의 길을 좇아 프랜시스의 청빈과 단순함을 본받고자 수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다양한 회원들과 작은 형제회의 숫자가 급격하게 증가하자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회칙을 철저하게 지켜야한다는 회원들과 현실에 맞게 완화해야 한다는 회원들과의 갈등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키가 크고 젊은 탄크레도가 프랜시스를 찾아와 격양된 어조로 요구를 하였다.
“성실한 형제들은 사부님께서 다시 지도권을 잡고 회칙을 오용하는 자들을 억제하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을 처단해 버릴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명백하고 확고하게 의견을 말씀하셔야 하며 응징의 조치를 취하셔야 합니다.”
얼마간 침묵이 흐른 후 프랜시스는 입을 열었다. “자기 의견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주먹으로 때려가면서 복음적 양선이나 인내를 실천하도록 가르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보다 자기 자신이 아픔을 받아 가면서 도와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분노는 어떻게 하냐?’면서 탄크레도는 흥분이 되어 목소리도 점점 높아지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프랜시스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어 가만히 앉혔다.
“주님께서 한 번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내셨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당신 집의 주인이시고,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것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꼭 한 번만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형제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은 다음 주님께서는 박해자들의 채찍에 자신을 내맡기셨습니다. 그것으로써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어떠한지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엄벌을 가하실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사랑을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탄그레도는 ‘스승의 말씀대로 따르면 무조건 싸움을 피하는 것이 되고, 그렇게 되면 모임은 많은 고통을 받으며 멸망으로 향할 것이고, 다시 새롭게 되기는커녕 분열을 거듭할 것이라.”고 다시 반박을 하였다. 그러자 프랜시스는 평온함을 잃지 않고 단호히 말을 하였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설득력이나 학문의 힘으로, 더욱이 어떤 강제적인 힘으로써 사람들을 정복하기를 요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내가 거룩한 복음의 양식을 따라 생활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나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한 이 세상 모든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에게 복종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작은 형제의 마음 자세입니다.
형제는 나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겸손하고 복종하는 태도가 형제에게는 비겁하고 무기력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나 역시 오랫동안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올가미에 걸린 새처럼 밤새도록 몸부림쳤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어 보게 해 주셨습니다.
인간과 인간 성숙의 가장 고귀한 것은 아무리 고상하고 아무리 거룩한 것일지라도 자기 사상을 따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든지 다 기쁘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임을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의 사상을 따르면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게 되며, 진실로 다른 존재와 친교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침묵, 내적 생활의 깊이, 그리고 평화가 결핍된 것입니다. 인간의 깊이는 받아들이는 능력에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들에게 새로운 경쟁자로 나타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그들 가운데 전능하신 분의 평화의 증인으로 나타나야 하며, 탐욕이 없고, 아무 것도 경멸하지 않는 진실로 그들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최초의 평신도 신학자로 불리는 성 유스티노는(100-165) 이교도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진리 탐구에 흥미를 갖고 많은 그리스 서적과 로마 철학자들의 책을 탐독했다. 하지만 학문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자기의 것이 최고이고, 진리를 연구한다는 사람들이 왜 서로 싸우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순교록」을 읽다가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는 순교자들의 희생을 보면서 ‘이것이 진리구나!’라며 그리스도교에 참된 생명의 진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게 되었다.
회심 후 놀랍게 변화된 그는 말한다. “논쟁에서 이기면 사람을 잃게 되며, 진리는 말과 지식에 있지 않고 자기희생에 있다. 창조주요 신이셨던 예수님도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셨다.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이다. 자기 헌신이 없는 학문은 껍데기에 불과하며, 자기희생이 없는 진실은 진리에서 멀어진다.” 
혹 우리는 말과 지식만 자랑하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돌아보자. 헌신과 자기희생은 없고, 말만 많은 헛 똑똑이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이 진짜냐? 가짜냐?’에 집중하다가 정작 빛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논리와 이치와 체면과 사실관계를 따지다가 정작 진리이신 주님과는 멀어지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모두 시끄러운 자신의 목소리를 멈추고 조용히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자. 주님을 닮기 위해 거룩한 바보로 살아가셨던 가난한 자들의 슬기를 힘껏 배우자. 그곳에 주님의 기쁨과 평화가 임하리라.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