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너 있었는가


 대천 지방에 전도를 하고 올라오는데 3월 꽃샘추위에 고속도로가 눈길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비바람을 맞으며 전도하고 올라오는 차 안이 조용하다. 다들 피곤하여 지친 모습인데, 옆에서 운전하시던 목사님께서 “저 오늘 목젖을 놓고 왔어요.”라고 말씀을 하셨다. “예? 목젖을 놓고 오다니요?” “예! 아까 찬양하며 기도할 때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그 동안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리며 아주 시원해졌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목을 놓아 찬송하고 기도하다 보니 목젖이 떨어져 나간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해요. 그동안 3년 동안 무지 힘들었어요. 목회를 하다 쉬니까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어요. 정말 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이제는 결심했어요. 집이고, 땅이고 다 내놓고 오직 주님만 위해 살기로 했어요. 오늘 주님께서 이 은혜를 주시려고 여러분들과 같이 전도하게 하신 것 같아요. 다음 주에도 갈이 갈게요. 오늘 참 잘 따라온 것 같아요.” 새롭게 거듭나는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나도 덩달아 힘이 났다.

그리스도인들의 자리

시련 없이 살아 온 사람은 미성숙하다. 굴욕을 느끼면 사람들은 비굴해지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련이나 굴욕을 통하여 성숙과 겸손으로 변화시켜 가신다. 눈물 없는 사랑은 가치가 없고, 고난 없는 축복 역시 그 의미가 없듯이 십자가의 고통 없이는 그 누구도 부활의 영광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 하루 순간순간 어떻게 살았느냐, 무엇을 했느냐, 어디 있었느냐. 진눈깨비 비바람 속에 복음을 전하는 그 곳에 있었느냐, 그냥 비도 오고 날도 추워서 집에 있었느냐, 현재 나는 누구와 있느냐, 어디서 있느냐, 무얼 하고 있느냐. 주님이 “거기 너 어디니?” 그 때에 ‘거기 너 누구와 같이 있었니? 거기 너 있었느냐 그 때에… 내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를 때’ 주님이 물으신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거기’가 둘이다. 하나는 가보고 걸어봐야 하는 ‘거기’와 또 하나는 앞으로 광야 길을 마치고 가야하는 ‘거기’가 있다. 먼저 가 보고 걸어야 하는 거기는 피와 땀과 눈물, 아픔과 고통, 어둠과 죽음의 골고다 언덕이다. 그 후에 생명과 평안, 기쁨과 감사, 사랑과 행복으로 충만한 하늘나라이다.

전자는 골고다 언덕이고, 후자는 영원한 천국이다. ‘거기’ 골고다 언덕, 피 묻은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걸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기’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맛볼 수 없다. 거기 골고다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은 사람은, 거기 하늘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 거기 골고다 언덕에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힘에 겨워 울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기 눈물을 닦아주시는 주님을 만날 수 없다.

거기 골고다 언덕의 벌거벗긴 그리스도와 벌거벗긴 수치를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거기 부활하신 주님과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지 못하리라. 거기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과 함께 그 고통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거기 하늘의 참된 기쁨을 맛보지 못하리라.

거기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서 “아! 목마르다!” 외치신 그리스도와 함께 그 목마름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거기 생명수 강가에서 “목마른 자는 다 내게로 오라” 하시면서 생명수를 공급해 주시는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

거기 골고다 언덕 위에 십자가에 달려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처절하게 버림받은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거기 하늘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와 영원한 안식을 얻지 못하리라. 거기 골고다 언덕, 가시면류관을 쓰신 그리스도와 함께 찌르는 고통 속에 피로 얼룩져 보지 않은 사람은 거기 영원한 천국에서 생명의 면류관을 써보지 못하리라. 거기 골고다 언덕에서 “아! 다 이루었다!” 하시며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주님을 위해 죽기까지 충성해 보지 않은 사람은 거기 새 예루살렘 성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리라.

온전한 십자가를 지기까지

“오! 주여, 내 목숨을 아끼다 주님께 욕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이 몸이 부서져 가루 되어도 주님 계명을 지키게 하시옵소서.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쏟으셨습니다. 주님, 나 위하여 죽으셨거늘 어찌 죽음이 무서워 주님 모르는 체 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오늘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어제 당하는 고통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을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모든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 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려. 예수님은 가시관을 쓰셨는데, 그의 종이요 제자인 우리는 오늘 왜 면류관을 쓰려고 하는가?

일사각오의 삶을 사신 주기철 목사님은 바로 거기 그 자리에 주님과 함께 계셨다. 오늘 누릴 축복보다는 고난의 자리를 선택하셨다. 오늘 누릴 안락의자보다는 영원히 누릴 하늘의 보좌들을 바라보며 온몸이 고통에 자지러지는 전기의자를 선택하셨다.

진젤돌프(모라비안교의 지도자)는 쥬셀돌프 미둘라가 그린 성화, 엑케 호모(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가시관 쓰시고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그 모습에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내 널 위해 이 모든 일을 너를 위해 겪었다. 넌 날 위해 무얼 했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 만 넌 날 위해 무엇 주었느냐?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는 무엇 하느냐? 네 죄를 대속해주었건만 너 무엇 하느냐? 이것이 귀중 하건만 날 무엇 주었느냐?

그는 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가슴이 찢어지는 듯 한 감동에 폭포수가 같은 눈물을 흘렸다. 자기의 남은 삶을 완전히 주님께 바치기로 결심하면서.

다만 그리스도만 믿고 그리스도만 사랑하고, 그리스도와 사귀고 봉사하는 기쁨을 느껴, 일체 모든 것은 다만 그리스도의 이름과 영광만을 위해서 살기로 했다. 예수님과의 친밀한 융합 일치요 특히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생각을 집중했다.

그는 “나의 신학은 피의 신학이다. 우리 교회는 십자가의 교회다. 다른 사람들은 피 없는 은혜를 받았지만, 우리는 피 있는 은혜를 받았다”는 지식만이 아닌 고난의 신학을 외치며 철저히 십자가의 삶을 사셨다. 그의 정신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수도적인 삶을 살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주님의 부르심이면 세계 어디나 복음 선교를 위해 떠났다. 그 후 헤른후트에서 파송한 선교사는 10년 동안 6백 명이나 됐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하리라”(14:22).

우리에게 지금 어려운 환경,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있을지라도 조금 더 인내한다면 하늘의 상이 클 것이다. 어둠 뒤에는 언제나 빛이 따라 온다. 슬픔 뒤에는 기쁨이 넘쳐 올 것이다. 선한 싸움을 다 싸운 후에 승리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다. 눈물로 씨를 뿌린 다음에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떡과 포도주만 떼는 만찬의 자리가 아닌 피와 살이 찢겨나는 거기 그 자리로, 골고다 언덕으로.

복음의 용사들이여! 하늘에서 개선 음악이 우리의 인생길을 따라 연주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말씀을 따라 힘차게 달려가자. 오늘도 주님의 평화를 노래하며 복음을 전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마지막 때의 나팔을 힘차게 불자. 쓰나미와 같은 폭풍해일이 덮칠지라도, 거친 눈보라 속에서도 ‘고난이여 오라!’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여, 복음을 증거 하는 용사들의 앞길에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