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얼 먹었기에 105세까지 살았나

c1a6b8f1_bef8c0bd7.png해진 뒤 하루 한 끼로, 어느 때는 이틀에 한 끼 먹으면서 고행한 기인이 있었다. 그가 빵과 소금, 흐르는 냇물이 전부인 단순한 식량으로 살면서도 105세를 장수한 비법은 무엇일까?

이집트 중부에서 큰 부자의 아들로 태어난 안토니(A. D Anthony)는 18세에 그의 양친이 세상을 떠남으로 큰 시련을 만나면서 동시에 많은 재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하마터면 우리의 진귀한 보화, 성 안토니(ST. Anthony)는 세속에 묻혀 살다가 잊힐 위험한 순간을 풍요 속에 맞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6개월 후에 교회 안에서 사도들을 명상하던 중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새김하게 되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19:21). 이 말씀에 큰 도전을 받고서 그 당시 성경 속의 부자 청년처럼 실패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이백 에이커가 넘는 비옥한 농원을 즉시 처분하여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정들었던 집안의 가구 역시 필요한 사람들에게 넘겨 준 후 미련을 뒤에 둔 채 고향집을 떠났다. 성자 가운데는 부잣집 출신들이 제법 많았다. 흥청거리며 살 수 있는 재산을 미리 누려본 결과 그것으로는 행복이 초대되지 않는다는 것을 일찍 배우게 된 은총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35세까지 지하묘지에서 수도하기도 하고, 그후 나일 강변에 있는 폐허가 된 성채에서 뱀, 독사, 도마뱀들이 우글거리는 사막에서 20여 년간 수도하는 중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이 몰려오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주님과만 더 깊은 교제를 하기 위해 사막에 있는 콜점(Colzom) 산속으로 들어갔다. 현재 120명의 수도사가 일생을 주님 앞에 올려놓고 영적 씨름을 하는 성지가 된 곳이다. 안토니어스 산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영성의 수원지를 찾아서

1700년이 훌쩍 지난 2009년 9월 마지막 날, 이집트의 두 사역자와 함께 안토니 수도원의 육중한 성문을 설레는 마음으로 조심히 열었다. 카이로에서 300킬로미터 거리다. 홍해를 끼고 남쪽으로 달려가다가 다시 우회전하여 사막 길을 달리면 광야에 솟은 바위산자락에 엄숙하게 누워 있는 성지다. 맑은 날이면 시내 산이 있다고 추정되는 시나이반도가 보이는 곳이다. 마치 감옥의 벽과 같은 10미터 높이의 담벼락은 세상과 담을 쌓으리라는 암시적 의미도 있으려니와, 유목민들이 갑자기 공격하여 수도사들을 죽이거나 아니면 양식을 약탈하는 강도떼들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란다.

305년에 토굴에서 시작된 수도원은 세계 최초의 수도원답게 엄청난 넓이의 공간을 차지해 하나의 성을 이룬 듯이 대규모의 수도원이 되었다. 미국의 한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후원으로 대대적인 확장과 보수공사를 통하여 위용 있는 수도원으로 비상하고 있다. 이 안에는 일곱 개의 교회가 있고 중앙에 성 안토니 교회가 있다.

안토니 성자가 기도했다는 바위굴에서 무릎 꿇고 성자의 영성을 사모했다. 몸을 조심히 움츠려 고개 숙인 채 컴컴한 굴을 5미터쯤 들어가다가 다시 1미터쯤 밑으로 내려가면 한 평 반 정도의 기도처가 자리잡고 있다. 2천 년 전 안토니의 향취가 풍긴다. 우리 세 사람은 안토니의 영성을 부어 주시라고 무릎 꿇고 간구를 올렸다. 예전에는 없었던 계단일 텐데 수도원에서 기도굴까지 1,200개의 계단을 밟으며 힘겹게 올라갔다. 겨우 하루 한 끼 빵 한 쪽으로 연명한 그가 어떻게 이 높은 산을 오르내렸을까 생각할 때, 또다시 나의 메마른 영성의 초라함을 느끼며 곧 풀어질 다짐이지만 습관적으로 그의 높은 영성을 흉내라도 내고자 욕심을 부려본다.

물론 오늘날의 수도원 형태는 그때와 많이 다르다. 우선 안내를 맡은 수도사들은 자기 명함을 거침없이 준다. 그 명함에는 반드시 이메일이 적혀 있고 전화번호가 있다. 연락할 일이 있으면 하라는 것이다. 개인 수도방도 옛날 같은 형태는 아니다. 전체적으로 전기도 있고 손님 접대실에는 시원하게 에어컨도 틀어 준다. 사람들과의 접촉도 그리 엄하지 않다. 그러나 그 영성의 힘은 결코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경건한 순례의 길의 개척자

안토니 성자는 주님과의 교제를 최우선으로 두었다.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의 벗이라 불렀다. 경건함을 사모하여 몰려든 갈급한 영혼들을 결코 등한히 여기지 아니하여 한때 오천 명까지 떼를 이루었으나, 주님과의 친밀함이 방해되었을 때는 더 외진 사막을 향해 그의 거처를 과감히 옮겼다. 세상 밖으로는 겨우 손에 꼽을 정도로만 나왔다. 박해가 심할 때 순교자가 되고 싶어 알렉산드리아에 찾아가 감옥을 돌아다니며 옥중 형제를 위로, 격려하고 재판정까지 따라가서 응원했으나 이상하게도 안토니 성자는 체포되지 않았다.

351년 바른 신앙을 위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안주의와 싸우는 아타나시우스를 지원하기 위해 수도를 방문한 일 이외에 거의 외출을 억제했다. 그러나 그의 영성의 영향력은 대단해서 콘스탄틴 황제와 그의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지도하고 권면했다. “이 세상과 권력에 도취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영원한 왕으로 모시고 섬기십시오. 주님 앞에 겸손하고 정의로 행하십시오. 특히 가난한 사람을 도우십시오.”

편지로 많은 사람을 권면했다. 이단들도 그의 교훈 때문에 바른 신앙으로 돌아서고 새로운 길을 걸었다. 내면적인 사탄과의 치열한 싸움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온갖 방법으로 공격하는 악한 영과의 싸움 때문에 그의 거처에서는 큰 고함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싸움의 승리는 초자연적인 빛이 흘러나와 비춰지면서 끝이 나곤 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살후3:10)의 말씀대로 살려고 기도와 노동에 힘씀으로 가냘픈 수도사의 삶은 기독교 수도원주의의 창설자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듯이 안토니는 수도사와 성도가 마땅히 밟아야 할 경건한 순례의 길을 개척해 놓았다.

주후 3세기 이후 기독교는 북아프리카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종교회의, 튀니지 카르타고회의 모두 북아프리카가 터전이다. 그런데도 당시 찬란한 영성을 꽃피우던 성지들의 80퍼센트가 모슬렘의 침공으로 하루아침에 종적을 감춘 희한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기독교는 세속화되어 힘을 잃은 상태이고 교회의 분쟁, 이단과의 논쟁 때문에 복음전도에 여력이 없었다는 것이 기독교의 약점이기도 하였다. 당시 성직자의 세력은 그 지방 권력가와 맞먹는 돈과 권력을 가진 타락한 종교였고, 성직매매가 유행되어 중세 타락한 기독교와 흡사한 처지에 있었다는 것이 우리의 수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히 짚고 가야 할 점이 있다. 칼이냐 코란이냐! 하는 모슬렘의 정체성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이슬람인들이 공격하여 콥틱 교인들의 혀 사백만 개를 잘랐다는 잔인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을 싹쓸이한 것이다. 인종 청소라는 잔인한 말이 있듯이 기독교 청소를 한 것이다.

A국에 사는 베르베르족들 사이에 기독교가 왕성히 일어나는 추세다. 그들은 기독교 종족이라고 말한다. 북아프리카 5개국을 위시해서 아프리카와 유럽까지 이천만의 베르베르족이 살고 있다. 지금도 모로코에서 해마다 베르베르족 컨퍼런스가 크게 열린다. 그러나 이 땅의 주인 종족은 아랍인들에게 쫓겨나 고산지역 산속에 묻혀 사는 반 유목민이 되었다.

7세기와 12세기 두 번에 걸친 아랍인의 침입은 복음의 터전을 흩어 놓은 것이다. 십자군 사건을 앞세워 기독교를 성토하는 그들의 위선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북아프리카에서 유독 이집트 콥틱교회만큼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국민의 13퍼센트가 기독교인이고 이집트 의사의 40퍼센트가 기독교인이다. 사도행전의 영성을 교회에 계속해서 공급하고 있는 반가운 소식은 그리스도인들은 박수치며 기뻐해야 할 축제인 것이다.

쓰레기 마을의 기적

중동지방은 주일을 빼앗겼다. 그러나 이집트 콥틱교회는 금요일이 아닌 주일예배를 드린다. 기독교인은 공무원도, 어떤 직장도 가질 수 없는 나라다. 카이로의 쓰레기를 주워다가 음식물은 돼지를 먹여 키우고, 상자나 병 등 재활용 쓰레기를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이집트 콥틱교인들은 악취 나는 쓰레기 마을에서 산다. 얼마 전 돼지 플루가 발생하여 돼지들이 모두 죽어 그리스도인들의 생계가 또 한 번 크게 위협 당하였다. 카이로에 드디어 쓰레기 반란이 일어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처참한 박해 속에서도 수도원에서 흘러나오는 짙은 영성으로 이집트 교회는 굳건히 견디며 든든히 서가는 것이다.

이집트 수도원은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자주 찾는 일상의 성지다. 장년이나 소년이나 수도원에 자주 들러 수도사들의 삶을 배우고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에는 그들에게 상담한다. 수도사들은 학문적으로나 영적 수준으로나 고매함을 지녔기 때문에 저들의 존경의 대상이고 따라서 지원하는 수도사들이 줄을 이어 모자람 없이 공급된다.

유럽이나 세계 여러 곳에서 신부나 수녀 그리고 수도사가 채워지지 않아 수도원이 거의 현상 유지만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상태다. 옛날처럼 활화산 같은 영성의 기름이 마르지 않아 수도원과 교회가 순결과 고난의 영성을 끊임없이 교류하므로, 무서운 박해에도 짓눌리지 않고 활력을 유지하는 이집트 교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콥틱교회의 성지라 할 수 있는 동굴교회를 방문했다. 만 오천 명이 앉아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인데 사도행전의 사건이 지금도 그대로 연출되는 살아 있는 현장이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바윗덩이가 굴러 빠져나와 만들어진 교회다. 연간 육천 명의 모슬렘들이 이곳에 와서 기적을 체험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신선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곳이다. 치료받고 내던져진 여러 가지 목발이나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나는 여기서 세계교회의 해답을 얻고자 한다. 수도사적인 선교사가 되는 길이 가장 강력한 사역자가 되는 비법이라는 사실이다. 수도원의 영성을 지속적으로 공급받는 교회가 되자는 것이다. 수도사의 거룩한 삶을 제외하면 교회는 누추한 모습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는 원리를 깊이 깨달았으면 한다. 이것이 마귀라는 적을 이기는 힘이요 행복이다. 웰빙을 몰랐던 안토니 성자는 지금도 살아서 105세의 생애가 아닌 영원한 나이로 나를 따르라 말씀하시는 것 같다.

뜨거웠던 수도원의 영성을 회복하는 길만이 교회가 강건해지고 또 신성한 교회로 부활하여 적군의 무서운 공격을 마비시키는 무적의 힘이라고 굳게 믿고 싶다. 안토니가 다시 태어나는 경사가 우리 시대에 꼭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동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