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 해결

갈등(葛藤)이라는 한자는 칡갈’, ‘등나무등이라는 글자다. 칡넝쿨과 등나무넝쿨이 서로 얽히고설키어 좀처럼 풀기 힘든 상태를 말한다. 죄인들이 모인 곳에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들도, 심지어 식물들도 갈등하여 한쪽이 망할 때까지 다투고 싸우기도 한다. 이것을 해결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입장 차이가 있고 자아가 강하고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 속에도 많은 갈등 관계가 나온다. 아벨과 가인의 갈등, 아브라함과 그랄 왕 아비멜렉의 갈등, 사라와 하갈의 갈등, 야곱과 에서의 갈등, 요셉과 형제들의 갈등, 다윗과 사울의 갈등,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 고린도교회 안에 있던 여러 형태의 갈등 등. 이렇게 갈등이 많은 것은 어느 한쪽이 훌륭하고 하나님 중심적이어도 갈등이 없을 수는 없다는 의미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있듯이 갈등 자체를 없앨 수 없다면 갈등의 주된 원인을 찾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차선책이 될 것이다. 갈등 관계를 만드는 대표적인 원인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소유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가치관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소유 문제를 살펴보면, 모두가 부족함 없이 혹은 차등 없이 가지고 있다면 갈등할 일이 없을 것이다. 아비멜렉과 그의 부하들이 아브라함을 괴롭히게 된 것은 아브라함의 소유가 아비멜렉의 소유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사라와 하갈이 갈등하게 된 계기도 아브라함의 자식을 갖고 갖지 못하고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야곱과 에서의 장자권 싸움도 장자가 받는 여러 가지 특권 때문이었고, 요셉과 형제들의 갈등은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것 때문에 시작되었다. 사울과 다윗의 갈등도 백성들의 칭송 소리를 듣고 다윗에게 왕권을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사울 왕의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없는 사람은 가진 자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는 자는 없는 자를 멸시하고 압제하면서 가진 것을 지키려는, 소유하고 못하고의 문제로 많은 갈등 관계가 생겨난다. 날 때부터 죄인인 우리가 갈등의 근본원인을 제거하기는 어렵다. 누구나 평등하고 동일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든 공산주의 사상은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정의로운 공동사회를 만들려는 이상을 담고 있는데, 죄 문제로 인하여 결코 실현될 수 없으며 극히 일부 권세자들을 위하여 대다수가 착취당하고 함께 못 사는 현실을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사람들 사이에 스스로 조율하고 조절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이상에서 비롯되었기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개입하셔야 진정으로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청지기 정신이 갈등을 해결해 주는 열쇠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아 잠시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이다. 청지기는 주인의 것을 맡아 관리하는 자이지 주인은 아니다. 그래서 청지기에게 요구되는 것은 주인정신이다. 그런데 이를 착각하여 주인행세를 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주인정신을 가진 사람은 주인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의무에 더 마음을 쏟는다. 반면 주인행세를 하는 사람은 주인이 누릴 수 있는 특권에 더 많은 마음을 쏟는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 정직히 행했다.’라는 평을 받은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과 상의하면서 하나님께 맡기고 도움을 받아 선한 청지기적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 솔직해서 정직하다는 평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하나님 뜻대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쳤기 때문인 것이다. 물질, 권세, 외모, 은사, 능력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받은 것이요, 하나님 뜻대로 사용하고자 마음을 먹는다면 인간관계에서 갈등은 많이 사라질 것이다. 소위 갑질하는 사회 문제도, 흙수저와 금수저의 갈등도 이러한 청지기 정신으로 충분히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갈등을 유발하는 또 하나의 큰 문제, 가치관의 차이를 살펴보면 나는 옳고 너는 잘못됐다.’는 독선과 오만에서 비롯된 갈등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내가 하는 것은 이유와 명분이 타당하고, 남이 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결론은 아집의 결정체이다. 물론 생각의 차이, 가치관의 차이 가운데 분명 좀더 옳은 판단, 좀더 명분 있는 주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끝까지 관철하려고 주장하다가 사람을 잃고 분열을 조장하고 더 큰 희생을 치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권면했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5:3).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을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로 갈등할 때에 자신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에 아무 거리낌이 없으나 연약한 자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선택을 하겠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8:13).

즉 가치관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인식을 먼저 버리고, 다음은 그러한 선택이 정말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이웃에게 덕이 되느냐.’를 따져서, 만약 아무리 옳다 여기고 최선의 선택이라 하여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거나 이웃을 실족케 하는 것이면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주장을 접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에 모든 계명이 다 들어 있고 이를 지키는 자가 계명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선한 청지기 정신과 하나님께 영광, 이웃에 덕을 끼치는 사랑의 정신만이 갈등을 해결하는 근본 방안이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 중심의 삶이라고 부른다. 자기중심적 삶에서 하나님 중심적 삶으로 변화되는 것, 이것이 천국 가는 광야 여정에서 연단 받는 중요한 이유다.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전6:6-7).

기영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