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걸이여도 좋습니다

시흥시 금이동은 시골은 아니지만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어떤 분들이 산골 오지라고 농담으로 말하기도 한다. 집은 계속 줄어들고 공장이 늘어나는 바람에 마을 가구도 몇 채 안 남았다. 그런 탓인지 금이동 뒷길은 45분 배차 간격으로 26번 버스 한 대만 지나갈 뿐이다. 그런데 지난 달 초부터 따뜻하고 복된을 줄인 따복버스25분마다 마을 어귀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지나가다가 마을 아주머니들과 마주치면 따복이 타고 가요.”라는 게 인사가 되었다.

손님이 너무 없다고 하시는 기사 아저씨의 말이 괜히 신경 쓰이지만, 아침마다 출발위치에 서 있는 따복 버스가 고맙기 그지없다. 일반버스보다 조금 작지만 마을버스는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기사 분과의 대화도 정겹다. 똑같은 코스를 하루에 열세 번 이상 운행하는 게 쉽지만은 않으실 텐데, 기사 분들은 한결같이 친절하다.

매일 동일한 시간, 똑같은 곳에 서 있는 따복 버스와 기사 분을 통해 작은 교훈을 얻게 된다. 내게 맡겨진 양들이 적든 많든, 하는 일이 크든 작든, 똑같은 일을 수없이 반복하든, 어떤 일이 주어지든, 하나님의 도구로서 자신의 위치를 잘 지키며 겸손하고 진실하게 충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세례 요한이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위치에 놓였을 때에 예수님이 등장하셨다. 시간이 지날수록 예수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갔고, 세례 요한의 주변은 사람들의 발길이 점점 뜸해졌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적잖이 당황했다. “선생님, 선생님이 세례를 베풀었던 예수라는 사람도 세례를 베푼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모두 그쪽으로 몰린다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자신들이 존경하고 따르던 스승이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 것을 보니 몹시 마음이 상했을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을 예수님께 빼앗긴 데 대한 질투심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지도자의 입장에서 위기일 수밖에 없다. 자기보다 월등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서 자신의 입지가 약해지면서 받는 상처는 엄청나게 클 것이다. 배신감과 허탈감에 분노가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하는 스승의 말에, 자신을 그토록 열심히 따르던 두 명의 제자도 즉시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그럼에도 세례 요한은 마음에 분노나 질투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도리어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고 하면서 조용히 물러났다.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알고 주님의 길을 곧게 하는 하나님의 종에 불과함을 항상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작은 소리이며, 그분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는 비천한 사람에 불과하다. 그러니 주님이 흥하고 내가 쇠하는 것은 당연하다.”

정채봉의 옷걸이에 나오는 이야기다. 세탁소에 갓 들어온 새 옷걸이한테 헌 옷걸이가 한 마디하였다. “너는 옷걸이라는 사실을 한 시도 잊지 말기 바란다.” “왜 옷걸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시는지요?” “잠깐씩 입혀지는 옷이 자기의 신분인 양 교만해지는 옷걸이들을 그동안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잠깐씩 입혀지는 옷이 내 옷이라고 생각한다면 엄청난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나의 지식과 지혜, 성품과 환경에 맞지 않는 것들도 때론 입히고 잠시 지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집착을 하거나 아집을 부린다면 우리 삶은 고통으로 일그러질 것이다. 혹은 세련되고 화려하게 입힌 옷들에 현혹되어 그것이 자신의 것인 양 우쭐대고 교만해진다면 그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로 선택되었다고 해서 거룩한 것도 아니요 의로운 것도 아니다. 주인의 뜻에 따라 입힌 옷들이 어떤 가치가 매겨지는 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자신에게 돌리지 말고 어떤 것도 높이 평가하지 않아야 한다. 다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리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해서 자만할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수많은 시험대에서 겸손에 대한 수업을 받아야 하는 학생에 불과하다.

믿음의 여정을 걷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거쳐야할 40년 광야학교도 겸손에 대한 오랜 수업을 받는 곳이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겸손이라는 과목을 온 몸으로 체득해 가는 과정일 것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8:2).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부끄러운 구원을 받지 않으려면 광야 연단을 받으며 온 몸과 마음으로 겸손을 익히고 또 익혀야 한다. 또한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죄인임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땅콩 박사로 유명한 조지 워싱턴 카버의 회고록에 있는 그의 고백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지만, 내 기쁨의 근원은 그곳에서 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언제나 행복했던 것은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 덕분이었습니다. 그것이 내게 가장 소중했고 내 인생을 사로잡은 전부였습니다.”

우리 기쁨의 근원은 자주 칭찬과 영광과 성공과 사람들의 존경에 따라 희비가 생긴다. 자신에게 걸쳐진 직분이나 사명의 옷이 자신의 인격과 신분인 양 착각할 때가 많다. 자신의 옷들에 따라 웃거나 울기도 하고, 열등감과 패배의식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교만으로 목이 뻣뻣해지기도 한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입힌 직분, 감투, 사역이라는 옷으로 우리를 평가하지 않으신다. 다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들을 겸손히 감당하는지에 더 큰 관심이 있으시다. 어떠한 옷들에도 좌지우지되지 않고, 슬퍼도 울지 않으며, 힘들고 불편해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가 겸손한 자다. 자신의 강함이 아닌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는 자가 하나님의 신실한 일꾼이다. 아무리 큰 사역을 감당해도, 아무리 높은 직분과 큰 단체를 진두지휘하더라도 우리 모두는 주인의 뜻에 따라 입힌 옷걸이에 불과하다. 이 사실을 늘 잊지 않고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옷들은 잠깐씩 입히는 것이다. 마음을 빼앗겨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살아가지 말고, 화려한 옷보다 약대 털옷을 사랑했던 세례 요한의 성정을 닮자.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옷을 입혀 주느냐가 전혀 문제되지 않았던 그 거룩한 겸손을 배우자. 잠시 옷걸이인 나에게 옷을 걸었다가 주님이 다시 가져가시면 또 주님 뜻이 있나보다 이해하고 순종하자. 나에게 걸쳐진 옷보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옷걸이로 사용하시는 기쁨을 달라고 기도해보자.

누더기 옷이 걸려도, 가끔은 비단 옷이 걸려도, 그것은 모두 주님의 옷이고 주님의 뜻이다. 주님의 옷걸이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만이 우리가 할 일이고 깊이 있게 성장하는 비결이다. 따뜻하고 복된 그 나라에서 우리 모두 흰옷을 입을 터인데, 그 옷이면 족하지 않을까. 거룩하고 따뜻한 주님 닮은 그 옷. 그날이 이르기 전에 주님이 내 옷걸이에 걸쳐 주시는 여러 가지 옷들, 그 옷들이 걸리는 기간에 매이지 말고 주님이 하셨음을 잊지 말자.

옷걸이여도 좋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옷들, 잘 걸었다가 돌려 드리겠습니다.”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