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고 원하며 또 원하는 마음

예수님처럼 살고 싶어서

평생 동안 걸인으로 길거리에서 살며 전도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을 그를 거지라고도 부르고, 성인(聖人)이라고도, 누군가는 위대한 영성가, 누군가는 순례자라고도 했다. 그의 이름은 분도 요셉 라브르. 걸인 중에 걸인, 거지 중에 상거지로서 당한 비참한 냉대를 자초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모욕하고 핍박하면 100배를 더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는 13년 동안 3km를 걸으며 좁은 길과 외딴 길로 다녔다. 산을 넘을 때에나 산길을 걸을 때에는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어 어깨에 지고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 지고 올라가는 주님을 생각하였다. 잘 때에는 땅위에서 자거나, 바위 밑에서 자거나, 지푸라기 밑에서 잤다. 분도가 평생 이런 삶을 산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였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가장 큰 죄인으로, 아무 것도 아닌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항상 말석에 앉았고, 다른 사람보다 우대하는 곳에는 아예 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방랑자, 거지, 게으름뱅이, 겉만 꾸미는 사람, 무식쟁이, 미련한 놈, 죄인이라고 취급하는 것을 원하였다. 미친 사람 같았고 외식자 같았다. 꾸미는 겸손같이 보였으나 그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었다.

비르지니라는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나요?” 그때 그가 한 다음의 말은 지금껏 신앙의 명언으로 남아 길이 회자되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은 삼합일심(三合一心)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화심(火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불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는 육심(肉心)입니다. 타인에 대하여 동정심을 가져야 합니다. 남을 사랑하고 도와주는 마음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셋째는 철심(鐵心)입니다. 이는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를 끊어버리고 자기에게 냉정한 마음입니다. 이 세 가지 마음이 합하여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화려하고 편리한 시대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먼 나라 얘기 같지만, 엄밀히 보면 말씀대로 제대로 산 사람의 이야기다. 그가 태어난 나라, 시대, 환경 조건 등은 중요치 않다. 그는 말씀대로 살고자 절실함으로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고독한 싸움을 스스로 했다. 그 간절함이 거룩함으로 바뀌었고, 결국은 주님의 거룩한 생명이 그 안에 숨어들어 주님과 하나가 되었다. 왜 그의 삶이 굳이 고행과 극기인가는 성경이 말해 준다. 주님의 길은 좁고 협착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비천의 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가야, 자기 영혼이 죄악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기에 그토록 원하고 절실했던 것이다.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건만 그 빛은 숨기우지 못하고 온 세상에 환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그의 삶은 어둠이 조금도 머물 수 없었던, 예수님의 밝은 빛으로만 반짝반짝 빛이 났기 때문이다.

원하는 마음을 갖고

모두가 원한다고 해서 그 길을 가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원하지만 또 누구나 갈 수 없는 길이 좁은 길이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예수님께 소리 질렀던 맹인의 절실한 원함은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을 이끌어 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 소경은 즉시로 보게 되는 일생의 소원을 이루었다. 마음에 두고 생각에 기록한 것이 몸을 이루는 것이다.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성령이시고, 성령은 마음을 지배하여 뜻을 이루고 마음의 사정을 하나님께 구하여 뜻을 받아들이는 중보의 역할을 하신다. 하나님의 뜻인 거룩함이 이루어지려면 성령을 통해 마음을 지배하고 생각에 기록되어 이뤄지는 것이다. 그리고 행함이 되어 겉 사람을 통해서도 뜻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기록된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8:6). 주님은 말씀하셨다. 생명과 평안을 얻는 비결은 육신의 생각을 멀리하고 영의 생각을 좇는 것 밖에 없다. 목표를 두고 자꾸 그것을 원하는 마음이 선행 되어져야 한다. 그래야 그 원함을 따라서 마음과 몸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도는 고행과 극기를 선택했고 소경 디매오는 간절한 외침으로 주님을 움직였다. 우리가 영적인 것을 원하면 우리 안의 육신은 거부를 하고 스스로를 연민하고 또 타인을 끌어들여 방해를 하곤 한다. 우리가 가는 원함의 길은 방해꾼들과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이때 나는 원하지만 드릴 수 없다는 생각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한두 번 원함을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절망을 하고 나면 주저앉아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원함은 쉼이 없이 계속 되어야 한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넘어지고 쓰러진다 할지라도 원하는 마음이 계속되어진다면 그것은 은총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 마음이 식어지면 다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넘어지더라도 원하는 마음을 다시 갖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는 그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 바로 절망이라고 말했다. 절망이 영혼 속에 들어오면 살릴 수가 없다. 절대적인 것에 대하여 불확실한 인간, 영원에 대하여 덧없는 시간 속에 존재하는 인간은 자신의 근본적인 한계를 인식하는 순간 절망한다. 나는 한계점에 도달한 인간이라고 생각할 때 절망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방법이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에게서 사용되었던 것이 아닐까. 원함은 큰데, 자꾸 육신의 나약함에 넘어지니까. 치고 또 치면서 자기를 복종시켰던 것이었을 것이다. 분도처럼 말이다. 예수님을 원하여서 그분처럼 살고 싶은데, 자꾸 정과 욕심에 이끌리니까 고향을 멀리하고, 가족을 멀리하면서, 사람들을 피해 산길을 걷고, 거지행색으로 그저 순례나 하는 일을 위해 전 생애가 필요했던 것이다. 소원의 항구로 나를 데려다 주는 일은 원함에서 시작한다. 무엇을 원하는가. 그 원함을 품은 순간 우리는 목표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목표는 분도와 다르지 않다. 예수님이다. 그분을 차지하기 위해 오늘도 나의 자리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영적인 자리를 차지하라

영적으로 침체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약해지고, 여러 가지 세상적인 염려와 걱정으로 가득 차 있던 분들이 확실한 믿음, 또 영적으로 여러 가지 감화와 감동을 받을 수 있는 내용이 많은 사람을 만날 때 힘을 얻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삼각산이나 청계산 근처에 가서 기도하는 소리만 들어도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러니까 훌륭한 영적지도자라든가, 영적으로 유익을 주는 사람을 자주 만날수록 소득이 크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적인 것에 많이 빼앗기기 쉽고, 약해지기 쉽고, 엉뚱한 생각에 잡혀서 마귀와 친해지기 쉽다. 그러나 영성생활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 또 영적 생활을 잘하는 분들을 만나게 되면 틀림없이 유익이 많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으로 가야하고, 그 자리에서 우리의 원함을 발견하고 또 발견해야 한다. 그 일을 위해 매일의 거룩한 일과를 짜야하고, 예배를 향해 나가야 한다. 그저 무릎을 꿇어 주님을 불러야 하고, 괴로워도 찬양을 하면서 주님과 가까이 있기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 우리는 영적인 것에 반응하는 신앙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룩한 길에 들어섰다. 하나님을 차지하려면, 그것을 원하는 마음이 식어지지 않게, 바람 앞에 불을 꺼뜨리지 않으려는 마음처럼 간절해야한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기대하시고 사랑하신다. 원하는 마음을 갖고 나아가는 심령에 성령의 도우심이 강력하다. 주님을 더 원하고 또 원하면서, 간절히 원하면서 그렇게 주님만 차지하길 원하라. 오늘 우리 생이 마지막인 것처럼.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