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한 분이면 족합니다

주일 아침, 7살 아이 집에 전화를 했다. 할머니께서 반갑게 전화를 받으셨다. 조선족 사투리 억양으로 오늘은 안 간 뎁니다.”라며 데리러 오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아이랑 통화를 하려고 전화를 바꾸어 달라고 하니 흔쾌히 바꾸어 주셨다. 아이스크림과 과자와 팽이치기, 블록, 캐치볼 등 아이가 좋아하는 놀이와 간식 등을 열거하며 교회오라고 설득을 했지만 반응이 시큰둥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 잃어버리면 안 될 텐데교회 와서 예배를 드려야 예수님이 기뻐하시지.”라고 하였더니, 갑자기 손가락이 아프다고 했다. 기도를 해준다고 했더니만, “기도해 줄 거예요? 그럼 교회 갈게요.”라며 밝게 응답을 했다. 아이의 순간적인 반응이 조금은 놀랍고 부끄러웠다. 다른 여러 가지에는 시큰둥하던 아이가 예수님기도라는 것에 즉각 반응을 나타내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도 역시 영적인 존재라는 다시 한 번 느꼈다.

사역을 하면서 무언가 갖추어 져야만 하나님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우를 범할 때가 많다. 그래서 예수님보다 다른 세상의 필요들이 더 앞서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불편함과 껄끄러움이 싫어 소유가 더 늘어나기도 한다. 불편함을 참아 가기보다는 주님의 일을 하는데 유용하고 필요하다는 선한 명분이 앞서기 때문이다. 실상 정말 필요한 것은 순간순간 주님과 함께 걸으며, 주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게 더 중요한 데도 말이다.

얼마 전 연합수련회 일정으로 전남 고창군 호암마을을 다녀오게 되었다. 그곳에서 두 분의 수녀님을 만났는데, 그분들의 소박함과 청빈함에 그동안 잃어버린 것이 많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정겨운 종탑과 아담하게 지어진 시골집들이 마을 어귀에 옹기종기 붙어 있었다. 나무들, 바위들 모두가 자연 그대로였다.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 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두 수녀님이 머물고 계신 곳을 잠깐 들렀다. 두 분이 새벽마다 드리는 소예배실은 1.5평 남짓 될까 좁디좁은 공간이었다. 낡은 책 몇 권, 십자가, 소박한 꽃꽂이, 아주 작은 도자기 안에 담겨진 등잔, 두 개의 돌에 새겨진 글귀가 전부였다. “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노라”(49:16), “나에게 힘을 주시는 주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4:13).

거실과 부엌은 더 소박했다. 겨우 두 세 사람 들어설 거실에는 낡은 식탁 하나뿐이었고, 기울어진 선반 위에 낡은 냄비 하나, 숟가락과 젓가락 두 세트가 전부였다. 싱크대는 낡고 낡아 굳이 저는 가난한 수녀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청빈을 말하고 있었다. 만남의 시간 중 가난한 사람들에게 문턱을 만들지 않고,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 가난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말씀이 공허한 말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고국 이탈리아에서 1968년 한국으로 건너와 고창 호암마을에 정착한 강칼라(73) 수녀는 한 평생 한센인들을 돌보며 살고 있다. 호암마을 한센인촌에 뿌리를 내린 지도 벌써 48년이 흘렀다.

목회자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친오빠의 꿈을 대신 이뤄야겠다는 생각에 수녀가 되어 19살 때 이탈리아의 한 수녀원에 들어갔다. 이후 작은 자매 관상 선교회에서 전쟁고아 120여명을 돌보며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한국에도 전쟁고아와 한센인이 많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막연히 한국행을 결심했고, 25살부터 지금까지 한센인 치료는 물론, 마을 노인들을 위해 봉사를 펼쳐오고 있다.

꽃다운 나이에 가난하고 낯선 한국 땅에 온 그는 가난과 불편함을 일상생활처럼 받아들이고 지금까지 살아오고 계시다. 거처하는 곳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단지 인내와 섬김과 기도와 희생과 사랑의 결이 더 깊어졌을 따름임을 조용한 음성 중에서 온 몸으로 말씀하실 따름이다.

지금도 몽당 연필과 낱장 메모지를 사용하고 계시다. 함께 동역하시는 한 분이 운전 중 메모지를 보기도 힘들고 잃어버릴 우려도 있어 작은 노트라도 장만하시라고 하지만, 그냥 엷은 미소를 띠울 뿐이시다. 불편해도 가난함이 좋은 것이다. 작은 것 하나라도 더 소유하면 주님의 힘이 아닌 자신의 힘이 조금이라도 가미될까 일까. 그에게 가난과 불편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의 그냥 평범한 도구일 뿐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소유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사람들을 한없이 부끄럽게 한다.

스스로 국산품(한국 국적)이 아니라고 하지만 누구보다 한국인이었다. 오랫동안 사용해 오던 이름도 스스럼없이 포기하셨다. “카를로라는 세례명을 잘 알아듣지 못하자 흑백이 아니고 칼라라고 시골 분들에게 자신을 소개하였다. 그 소박함과 겸손은 낯선 이방인이라는 벽을 허물었다. 강이라는 성도 처음 호암마을에서 만난 강씨 성을 가진 한센인이 제 성을 꼭 사용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하여 사용하게 된 것이다.

리어카 한 대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좁은 골목에 위치한 수녀원은 겨울이면 큰길에서부터 연탄을 옮겨야 한다. 높은 오르막길을 수없이 왕복했다. 그 와중에도 판자촌 결손가정 아이들 80명을 위해 봉사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불평하면 이 마을에 살 필요가 없습니다. 더불어 사는 공동체입니다. 가난한 사람과 사는 것,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겠다는 것은 주어진 은총입니다. 함께 길을 가는 거니까요. 어려운 것을 보고 내가 선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면 사람을 사랑 할 수 있고, 많은 시간을 얻습니다. 기도는 은총이며 생활의 뼈입니다. 잘 시작하고, 계속 할 줄 알아야 하고, 잘 맺어줄 알아야 합니다. 기차 길처럼 하나님과 생활을 같이 걸어가야 합니다. 많은 일이 아니라 어떻게,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제대로 살기 위해서 어려움과 불편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꾸중은 결코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니까 할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 마십시오. 주어진 것을 희망으로 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큰 것을 바라지 않고, 해야 할 일을 그날그날 충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어려움이 더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나는 죽여도 사랑을 죽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행 중 한 분이 주님께 받은 어떤 특별한 은총을 말씀 해달라고 질문을 하였다. “제일 큰 은총은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라고 짧게 답변하셨다.

어려운 분들과 함께 사니까 사랑을 도리어 배우게 됐다고, 생활로서 가난을,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기도의 모습을 보이는 그의 삶이 그 무엇보다 고귀하고 순결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나의 부요함과 안락이, 나의 여유와 욕망이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부끄러워해야 할 많은 것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살아왔음이 죄송했다.

눈에 보이는 성과를 이루고 그럴싸한 사역을 하지 못함이 아니라, 주님과 순간순간 함께 하지 못함이다. 채움보다 비움을 배워가고 높이 올라감보다 낮아짐을 배워가고, 성공보다 겸손을 배워가고, 부요함보다 주님의 맑은 가난을 배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텐데 여전히 부족하기만 하다. 모든 소유를 다 잃어버릴 지라도 예수님 한 분이면 그만인 삶의 중심에, 다시 한없는 갈망으로 서길 소원한다.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