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두 가지 교훈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을 가진 은수사가 있었다. 그가 마귀에게 물었다. “무엇이 너희들을 떠나가게 만드느냐? 금식이냐?” 그러자 마귀는, “우리는 먹거나 마시지 않는단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철야냐?” “아니, 우리는 잠을 자지 않는단다.” “세상으로부터의 이탈이냐?” “아니, 우리는 이미 사막에서 살고 있단다.” “그렇다면 어떤 힘이 너희를 떠나게 만드느냐?” 마귀가 마지막으로 답한다. “겸손 외에는 아무 것도 우리를 정복하지 못한다. 너는 겸손이 마귀를 이기고 승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프랜시스가 성자라고 높임을 받는 것을 시기하던 제자가 어느 날 프랜시스에게 질문했다. “선생님은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프랜시스가 대답했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악한 자라고 생각하네.” 제자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선생님,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세상에는 도둑도 있고, 강도도 있고, 악한 자들이 많이 있는데, 선생님이 제일 악한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거짓입니다.” 그러자 눈물을 글썽이며 프랜시스가 대답했다.

자네는 몰라.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가 무척 크다네. 그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푸셨다면 그 사람은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거라네.“

마귀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하는 겸손과 프랜시스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자신의 작음을 고백하는 마음을 합치면 진정한 겸손이 되는 것 같다.

우리가 흔히 아는 겸손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다는 뜻이 있다. 그러다 보니 겸손의 표양들 즉 낮은 자리에 앉기, 아는 척 하지 않기, 존댓말 하기, 작은 자에게도 사랑을 베풀기, 내가 잘하는 것이 있어도 나서거나 말하지 않기 등등의 수많은 모습들은 행함을 강조한다. 또 그 많은 행동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다 자기를 낮게 여기고 가만히 있는 것에 초점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행동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억지와 보이기식 겸손도 종종 나타난다. 하나님을 위한 행동이라고 행했지만 은혜가 빠진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낮아지고도 속상하고, 자존심 상하고, 또 주님이 주신 달란트를 활용해 영광을 올려드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일을 더 좋게 할 수도 있는데, 겸손에 속을 때도 있다.

겸손에 프랜시스가 말한 은혜가 더해진다면 겸손은 말 할 수 없는 찬란한 빛을 발휘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자기를 위한 겸손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우러나오는 진실한 겸손을 완성하면 주님이 더 기뻐하시리라 본다. 프랜시스의 말처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어찌 다 셈할 수 있을까. 내가 아닌 그 누군가에게 주셨다면 더 하나님을 위해 빛날 일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걸 생각하면 저절로 탄식이 된다. 나의 무지와 교만, 어리석음과 우둔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막았구나. 어휴, 그렇구나.

어떻게 보다는 이렇게

마카리우스는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는 질문을 받고서 이렇게 대답했다. “오랫동안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두 손을 펴고서 주님 당신은 아시오니 당신의 뜻대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하십시오. 만일 갈등이 더 치열해지면,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잘 알고 계시므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입니다라고 답한다.

성경을 봐도 인간은 정말 인간스럽다. 구약에서부터 신약으로 넘어오는 순간들마다 내가 거기 있다면 나도 그랬을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지 말라는 것은 그렇게 하고 싶고, 조금만 맘에 안 들어도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으며 하나님 앞에서 고집을 부리고 온갖 심통을 부린다.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이렇게 해라, 라고 말씀하시지만 인간인 우리 맘에 맞아야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급기야 주님은 교만한 인간의 마음을 낮추시려고 연단이라는 통로를 사용하시고 광야 여정을 걷게 하신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40여년의 길은, 불평장이 인간에겐 참 멀고 때론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낮에 구름 기둥으로, 밤에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면서 너무도 친절하게, 때론 엄격하게 단련하시는 사랑을 베풀어 주시니 그 은혜를 인하여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어떻게 해요 주님?”이라고 소리를 치고 다급하게 말하면 주님은 언제나 이렇게 해라, 라고 부드럽고 온유하게 말씀하신다.

이렇게의 수많은 내용들은 친절하신 주님의 감동으로 성경에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지도처럼, 해답처럼, 이렇게 해라. 이렇게 하면 된다, 라고 말씀하시는 글자들 사이사이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보고 느낀다. 그저 주님이 알아서 하실 일들과 길을 우리는 그분의 보호 아래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가는 거야. 이렇게 말하는 거야. 이렇게 사랑하는 거야. 이렇게 인내하는 거야. 이렇게 섬기는 거야.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어떻게 그렇게 해요? 반문을 하다가도 그 온유하시고 깊으신 배려와 사랑에 . 알겠어요. 주님.”을 결국 말하게 된다.

나로 인하여

하나님은 인간 때문에 참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이 처음 나를 만들었을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하시면서 에덴낙원을 허락해 주셨다. 외로울까봐 아내도 허락하시고 동물 친구들도 허락해 주셨다. 멋진 풍경을 주는 식물 친구들도 허락하셨다. 그런데 순종하지 못한 죄로 인해 타락했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이번엔 독생자를 주셔서 인류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회복을 약속하신다. 사랑의 근본, 사랑 덩어리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이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는 인간이 나, 우리 인간들이다. 하나님은 내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고 고백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나 주시는 직분, 물질, 돈 혹은 그 밖의 것들로 하나님의 사랑을 평가할 때가 많다. 때론 남의 것과 비교도 한다. 이제 그만 어린아이의 일을 벗어버릴 때다.

그리고 이제는 내 차례다.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겠다, 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부응하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시는 주님을 알려야만 한다. 왜 우리를 정금같이 단련하시는지, 왜 천국을 사모하며 나아가야 하는지, 왜 상 받기 위하여 노력해야 하는지, 왜 성화로 가야 하는지, 왜 주님 다시 오심을 기대하며 기쁨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전하고 알려야 한다. 수가성의 여인처럼, 그물을 버려두고 나섰던 제자들처럼, 니고데모의 놀라운 감격처럼, 사도바울의 목숨 같은 헌신처럼,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예수님의 충성과 희생처럼, 우리도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3:17).

노랫소리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운 사랑의 고백이 아닌가. 우리가 한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받는 이 넘치는 은혜와 사랑은 골백번 죽어도 갚을 수 없는 데 말이다. 나에게 주신 은혜를 에게 주었더라면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더 높아지고 주님이 영광을 받으셨을까 프랜시스처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사랑에 화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어떤 이는 사막으로, 동굴로, 깊은 산속으로, 거친 광야로, 낮은 사람들 틈으로, 병든 이들 속으로, 버려진 아이들에게로 즐거이 들어가 기쁨의 일생을 드리기도 했다. 내 주위와 환경, 함께 하는 이들, 지금 하는 일들을 보며 다시 은혜와 겸손으로 정비하길 원한다. 겸손의 의미를 다시 새기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주어진 모든 것들을 보기 원한다. 나로 인하여 기뻐하시는 주님을 나도 기뻐하며, 주님을 온전히 누리고 전하는 하나님의 착한 아이가 되길 다시 기도한다. 사랑하는 주님, 내 아버지 앞에.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