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어린 시절 본의 아니게 이름 때문에 옆 집 오빠한테 지렁이라고 불렸던 적이 있었다. 창문을 열고 “야, 지렁아! 오늘은 뭐하냐?” 그러면 화가 나서 벌컥 소리를 지르며 “내가 왜 지렁이에요?”라고 반박을 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성경책을 보다가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라는 성경 구절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아, 성경 인물 중에도 지렁이라고 불린 분이 있었네. 내심 반갑기도 하면서 조금은 의아해 했다. 하지만 근래에 그토록 듣기 싫었던 그 지렁이가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달았다.

난 지렁이가 아니야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욥25:5-6),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사41:14). 왜 하필 하나님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사람을 벌레로, 구더기로, 지렁이로 표현하셨을까? 그래도 멸치는 뼈대(?) 라도 있는 집안이지만, 눈도 귀도 뼈도 없는 부패한 음식을 먹고 사는 징그러운 지렁이라니.

그러나 ‘난 지렁이가 아니야’라고 반박할 수 없는 비애가 우리에게 있다. 구더기와 흙덩이를 의복처럼 입고(욥7:5) 살아가는 우리의 더러운 마음과 행실이 난 벌레임을 자처하고 있지 않은가? 60만개의 자아 중 단 하나라도 밟히면 지렁이처럼 꿈틀꿈틀 아우성을 치니 말이다.

누군가가 나를 조금만 무시하거나 기분 나쁜 말을 하면 이내 울컥 하고 반응이 나타난다. “난 지렁이가 아니야. 왜 나를 무시하는 거야. 왜 기분 나쁘게 나를 밟는 거야.” 음식의 맛이 없거나 식성에 맞지 않을 때도 불평, 원망, 짜증이 올라오며 입이 꿈틀꿈틀. 불쾌한 냄새를 맡을 경우에도 얼굴을 찡그리면서 꿈틀꿈틀.

듣기 싫은 소리를 들을 때면 마음이 뒤틀리며 꿈틀꿈틀. 몸이 조금만 찌뿌듯하고 피곤해도 퉁명스런 말로 얼굴로 찌푸리며 꿈틀꿈틀. 누군가가 나보다 앞서가는 것 같을 때 질투가 올라와 꿈틀꿈틀. 날씨가 조금만 더워도, 습기가 좀 차도, 날씨가 추워도, 환경이 조금만 불편해도 마음과 행실 가운데 자기중심적인 행실들이 꿈틀거린다.

눈이 없어 앞을 볼 수 없는 지렁이처럼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우리의 인생이건만, 스스로 인생을 설계하려고 하는 무지와 교만에 빠져 꿈틀꿈틀 할 때가. 속에 내 욕심을 숨기고서 겉으론 선한 명분을 내세우며 밀어붙이다가 상대방에게 흙탕물을 튀기며 상처줄 때가. 부패한 음식을 먹는 지렁이처럼 부패한 정욕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 때가. 습하고 어두운 시궁창에서 살아가는 지렁이처럼 밝은 빛에 자아가 드러나는 게 싫어 허례와 위선의 그림자로 자신을 숨기며 살아갈 때가 또 얼마나 많은가. 살짝만 밟혀도(범죄 할 기회만 주어지면) 이리 꿈틀 저리 꿈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영락없는 지렁이다.

연체동물이라 스스로 직립하지 못하는 지렁이. 우리는 그 지렁이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부패한 육성으로 인해 주님의 도움 없이는 빛 가운데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지렁이가 아니야. 난 지렁이로 살아갈 수 없어. 내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아’라면서 세상의 화려함으로 우리의 본 모습을 숨기며 살아가고 있다.

저는 벌레입니다

자기의 잇속 챙기기에 꾀바른 야곱을 하나님은 삼촌 라반의 집에서 무려 20년간 머슴살이를 시키셨다. 라반에게 이리저리 짓밟힐 때마다 끊임없이 꿈틀대는 자아와 싸우며 많은 쓰라림과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20년간의 광야여정을 통하여 야곱을 닦달질하여 그의 옛사람(자아)을 깨트려가셨다. 어떠한 환경과 조건 가운데서도 굼틀거리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가셨다.

얍복 강가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서슬 퍼런 칼로 무장한 400백 명의 부하를 이끌고 오는 형 에서 앞에 무기력 했던 야곱은 지렁이처럼 허물거리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날이 새도록 기도하며 천사와 씨름 하였다. 결국 이로 인해 환도 뼈가 위골되어 더 이상 꿈틀대지 못하는 절뚝발이가 되었다. 그제야 야곱은 자신이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렁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어두운 눈과 귀를 열어주신 하나님만이 지렁이 같은 야곱에게 진정 방패요 산성이셨다.

강직성 척추염으로 쓰러져 40평생 병상생활을 하셨던 저의 선생님께서는 “저는 인간 기생충입니다.”라는 말씀을 자주 사용하셨다. 선생님은 뼈마디의 진액이 다 말라 무릎 뼈, 환도 뼈, 목뼈가 다 굳어져 대소변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가실 수 없는 분이셨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마른 막대기와 같은 선생님을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로 삼으셨다.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보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 같게 할 것이라”(사41:14-15).

조금만 힘이 들고 피곤해도 엄살을 피우며 요리저리 숨을 궁리만 하는 바퀴벌레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선생님은 말씀하신다. “어떤 분은 저에게 음식을 입에 넣어줄 테니까 누운 채로 편하게 식사를 하라고 하시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저의 팔을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제 손으로 직접 식사하기를 원하신답니다. 저는 하나님을 엄살이나 꾀병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극한 고난 속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시며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선생님의 삶이 무디어진 내 양심에 날카로운 말씀의 칼이 되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하신다. 또한 외적인 조건과 현실적인 애정과 욕망에 얽매여 무당벌레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순간순간 일깨움을 주신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마음에 있는 것이지 외적인 조건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같이 외적인 조건이 불행스럽게 보인다 할지라도 저와 같은 사람이 행복이라고 증거 한다면 그것이 바로 순수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수하고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저로 하여금 병상에서 불행한 육체적 조건을 가지고 생활하도록 섭리하신 것 같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22:6). 벌레요 구더기요 지렁이 같은 우리를 위해 주님은 온갖 모욕과 조롱거리를 참으셨다. 우리 때문에 ‘벌레의 왕’이 되셨던 그 주님 앞에 뭐라 말할 수 있으랴. 밟고 또 밟아도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그 어린양이 만왕의 왕이요 심판주로 오실 날이 멀지 않았다.

그 날에 죄성과 정욕의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기 위해 지렁이 같이 더러운 우리의 마음과 행실을 맑은 물로 닦고 또 닦아나가자. 꿈틀대는 자아가 다 부서져 없어질 때까지 이 광야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자. 주님께서 날카로운 밝은 빛의 검으로 우리의 모든 자아를 산산이 다 부수는 그날까지!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