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선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실천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때로는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며, 어떤 상황에서 지켜야 하는 것인지 애매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겉옷을 빼앗고자 하는 자에게 네 속옷까지 금하지 말라.’(6:29)는 말씀에 감동을 받았다고, 실제로 겉옷뿐만 아니라 속옷까지 벗어주는 일은 실천하기 어렵기도 하고 거리에서 그랬다가는 자칫 큰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말씀을 실생활에서 적용하기란 참 쉽지 않다. 그래서 말씀은 근본이자 원칙이지만, 현실에 적용하는 데는 지혜가 필요하다.

어느 선까지 해야 하는가에 관하여 논하고자 한다면 적정선이란 의미보다는 한계선(限界線)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할 것이다. 어느 선까지는 할 수 있고, 어느 선 넘어서는 할 수 없는지. 그러나 이런 경계선을 획일적으로 정할 것이 아니라, 각자 믿음의 분량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에 적정선이라는 표현이 타당하다.

물론 성경에는 힘에 지나도록 하는 것’(고후8:3)을 칭찬하는 말씀도 있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다 그리할 수는 없기에 각각의 상황에 따라, 또 믿음의 분량에 따라 적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12:3).

지하철을 타고 가다보면 도움을 청하며 지나가는 사람을 자주 만난다. 한 번 두 번 쌈짓돈을 꺼내 도와주었는데, 세 번째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지갑을 여는 것에 망설여진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원수를 사랑함이 마땅하고, 원수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할 때에 마실 것을 주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마땅하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어린 신앙의 사람이 이 말씀을 받았다고 그대로 실천하기는 어렵다는 데 문제가 있다.

만약 원수가 나타나면 멱살 잡고 싸움을 하던 사람이 말씀에 찔려서 그 다음 번에는 몸은 사용하지 않고 말로만 불편한 마음을 표현했다면 장족의 발전을 한 것이다. 그 다음에는 속으로만 품고 얼굴에 싫은 표정 나타내지 않으려 애쓰고, 마지막에는 속마음까지도 주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다면 이것이 진정한 원수 사랑의 단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행동과 언어와 마음의 변화까지는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누구나 말씀을 온전히 실천하기까지는 오랜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더욱 높은 단계의 실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자녀에게 부모를 따라 장기 금식을 하라고 강제할 수 없는 것처럼, 신앙연조에 맞게, 상황에 맞게 지혜롭게 적용하여 적정선을 제시하는 것이 부작용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도 상대가 받지 못할 말씀으로 올무를 씌우지 않으려고 하신 것이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5:11-12).

적정선을 어디쯤 그어야 할지 성경에 좋은 예가 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의 사로잡힘 소식을 듣고 동맹한 자들과 집에서 키운 사람들 318명과 함께 엘람 왕 그돌라오멜 연합군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 상황이다.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오직 소년들의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취할 것이니라”(14:21-24).

왜 아브라함은 승자가 전리품을 취하는 당연한 풍습을 거부했을까? 오로지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기를 원하는데, 자신이 실속을 차림으로써 소돔 왕이 훗날 딴 소리를 할까봐 그런 것 같다. 아브라함이 딴 생각이 있어서 전쟁을 치렀다는 둥, 욕심 부려서 다 몰수해갔다는 둥. 기껏 좋은 일 해놓고도 시기하는 사람,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곤란 겪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아브라함은 사전에 그런 싹을 잘라버린 것이다. 누가 봐도 깨끗하고 공명정대하게, 그러면서도 함께 전쟁에 동참했던 우군들의 몫과 실제 소요된 경비만큼은 챙겼다.

자신의 몫은 포기하고 이웃의 것은 챙긴 아브라함, 그의 선택 기준 두 가지를 볼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될 수 있느냐, 다른 하나는 어느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즉 사심(私心)을 내려놓고 빛을 기준으로 삼았기에 아브라함의 처사는 공명정대했던 것이다. ‘말씀 실천하는 데 적정선이 어디냐.’라는 물음에 대한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내 행동, 내 선택이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 신자 불신자를 떠나서 누가 봐도 흠 잡지 못할 만큼 정당한 처사인가?

상황에 따라, 개인의 성향에 따라, 형편에 따라 일괄적으로 말씀을 적용할 수는 없기에 감당할 수만 있다면 힘에 지나도록, 하나님에 대한 절대 믿음을 가지고 남들이 쉬 따라할 수 없는 영웅적인 덕행을 할 수만 있다면 영적으로 훨씬 더 유익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는 것이 쉽지 않기에 우리는 많은 선택 가운데 갈등하게 된다. 개인의 욕심이 적정선을 흐리게 할 때, 우리는 성령님의 이끄심과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를 구하면서 내가 그은 선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적정선을 그을 수 있는 영적 담대함을 가지면 좋겠다.

기영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