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 인생’이란 말이 있다. 사회학적으로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즉 사회의 주도계층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로서 스스로 생각해도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변두리 인생들을 부르셔서 귀한 인생이 되게 하신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 또한 하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곳 자체가 변두리였다. 또 실제 예수님이 태어나신 장소 베들레헴 역시 이스라엘에서 볼 때 중심지가 아니라 변두리이다. 직업 또한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아버지를 도와 목수일을 했기 때문에 변두리 인생을 사셨다.

30세까지는 전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변두리 인생이었다. 오죽했으면 나중에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하셨을 때,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저가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했겠나.

이렇게 우리 주님은 변두리 인생으로 오셔서 변두리 인생인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의 말씀, 구원의 축복을 주셨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인생들이 온갖 고난과 핍박과 학대를 받으며 살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비록 변두리에 있지만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신다.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도구로 만드시기 위해 광야로 몰아내신다. 주님께서 친히 모범을 보여주셨다.

“예수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사 광야로 가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마4:1). 주님을 따르는 모든 일군들, 사역자들은 예외 없이 광야훈련을 거쳐야 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등 성경에는 하나님께 쓰임 받은 일군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같이 결박과 환난, 궁핍, 시험이라는 광야훈련을 받고난 뒤에야 비로소 쓰임 받았다.

즉 변두리 인생에게 처한 환경자체가 하나님께서 훈련시키고 계신 광야인 것이다. 이 광야훈련을 소홀히 가볍게 여기지 말자. 하나님은 우리를 저울에 달아보신다. 교만하기 쉬운 환경 속에서 겸손의 열매를 얼마나 맺고 있는지 달아보신다. 원망 불평하기 쉽고 마음에 별로 들지 않는 환경 속에서 얼마나 자기부인하고 십자가 지는지, 얼마나 오래 참고 절제, 충성, 사랑하는지 감찰하신다.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신다.

우리는 아직 훈련 과정에 있다. 훈련이 끝나고 휴가 나온 것이 아니다. 아직 훈련소에 있으니 훈련을 잘 받아야 한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했다. 즉 변두리 인생에게 닥친 환난 가운데 연단을 잘 받아야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군도 되고 나아가 익은 열매도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훈련과정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불평하지 말라.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나는 나는…’ 하고 자신만을 들여다 볼 뿐 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늘 세상에서 자신만이 가장 불행한 줄로만 생각하고, 늘 고민하며 실망 가운데 신세한탄이나 하는 그런 사람을 배꼽인생이라고 한다. 언제나 근심과 탄식으로 자신의 발만 볼 줄 알았지, 자기 배꼽을 중심으로 하여 눈에 보이는 1 미터를 넘기지 못하는 좁은 시야를 가지고 사는 인생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즉 배꼽을 향한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라는 뜻이다. 여기에 우리 인생의 해답이 있는 줄 믿는다. 우리는 오리무중의 인생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잘 아신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믿고 우리의 인생을 전적으로 맡기는 믿음이 필요하다. 어느 정도 훈련이 되고 그릇이 깨끗해지면 하나님께서 쓰실 것이다.

이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