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21:13). 체포당할 것을 계시 받은 신실한 형제들의 말림도 뿌리치고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바울 사도의 장엄한 모습이다. 그는 순교정신으로 알뜰히 무장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삶 속에 순교가 저장되어 있었다. 몸을 쳐 복종시키는, 자신이 자기를 죽이는 순교였다. 짐승을 죽여 제사 드리듯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12:1)로 드리라고 하신다. 교회 안에서는 죽은 것 같은데, 밖에만 나오면 모락모락 살아나는 이 혈기를 죽이자.

목숨 걸고 신앙 지킨 중국의 황 장군이 있었다. 한 선교사의 우연한 죽음을 목격한 후 그의 인생은 변화가 왔다. 외국인을 몰아내자는 비밀결사단체가 일으킨 북청사변 때 폭도들은 선교사를 잔인하게 살해하였다.

난폭한 살인자들은 선교사의 손목을 자르고 팔을 잘랐다. 이어 발목을 끊고 두 무릎도 베었다. 사지가 잘린 온 몸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목숨은 꺼져가는 등불이 되었다. 이때 폭도들은 “마지막 할 말이 있는가?” 하고 다그쳤다. 이때 창백한 선교사는 가슴 저미는 말을 남기고 숨졌다. “나의 아들에게 말을 전해 주시오. 중국에 선교사로 와서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가라”고.

예수님도 순교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한결같이 순교했다. 최초의 선교사 바울도, 맨 처음의 집사 스데반도 인생의 길을 마쳤다. 초대교회는 으레 순교할 각오로 신앙을 지켰고, 지금도 지구에 매년 20만 명의 크리스천들이 복음을 위해 순교 당하고 있다. 일사각오(一死覺悟)를 가진 주기철 목사의 시퍼런 신앙기백을 일본이 꺾지 못했고, 죽으면 죽으리라 다짐한 안이숙은 격찬 받는 여성이 되었다.

신앙생활이 지루하고 마귀의 유혹에 자꾸만 넘어지는 이유는 순교 신앙이 수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고자 하는 사람만이 살도록 되어 있다. 나를 위해 죽으신 내 구주 예수님을 위해 ‘순교자’가 되는 각오를 다짐하자. 단 한 가지, 얼굴에 웃음을 잃지 마라. 돌 맞아 죽기 전에 순교자 스데반이 보였던 천사의 얼굴처럼 곱게 꾸며라. 할렐루야!

이동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