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함으로 길들이라
지난 한 달, 교회에서 “온유의 달”로 정해서 실천하는데 힘쓰기로 했다. 당시에는 대수롭게 않게 넘겼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틀 전의 일이 떠오르며 ‘온유’라는 단어가 마음 한구석에 파편처럼 콕 박혔다.
텃밭의 오이와 고추 대를 오후 1시쯤 몇몇 자매들과 함께 세우는데, 마음이 조금 불편하여 괜히 짜증이 올라왔다. “아침 일찍 작업을 하거나 해도 길어졌으니까 저녁 무렵에 하면 더 좋을 텐데, 왜 하필 햇볕이 뜨거운 오후에 해요?” 퉁명스럽게 한마디 툭 내뱉었다. 그리고는 창고 1층 앞에 놓인 고추 대 두 묶음을 들고 오는데, 제법 무게가 나갔다. 텃밭의 한 모퉁이에 고추 대를 내려놓는데, 철퍼덕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몇 몇 자매들이 고개를 돌리더니만 약간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멋쩍음과 동시에 마음의 불편함을 그대로 드러낸 듯해 살짝 민망함이 일어났다.
오이 대를 양쪽에 세우고 노끈으로 묶고 있는데, 어떤 분이 한 자매님에게 “○○자매님, 오늘 정말 탁월한 일꾼이네요.”라고 칭찬을 하자, “이왕 하는 것 즐겁게 하면 더 좋지요.”라면서 신이 난 듯 열심히 일을 하였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데, 나의 부드럽지 못한 언어와 마음씨가 분위기를 살짝 가라앉게 하는 요인이었음을 깨닫고 곧 후회가 되었다. 그리고 ‘온유의 박사’로 불리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한 숟가락의 꿀이 백통의 식초보다 파리를 더 많이 잡는다."는 말이 떠오르며 회개가 되었다.
길들여지지 않은 우리의 악한 본성은 조금만 불만족스러워도 감정과 기분에 따라 온화하고 부드럽지 못한 언어가 툭툭 튀어나온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귀의 성질이 뿌리박힌 자신의 성품을 길들이는데 순간순간 주력을 다해야 한다. 무엇보다 성화(聖化)를 목표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데 힘써야 한다.
예수님은 친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11:29)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어린양처럼 도살되기 위해 끌려가면서도 입을 열어 항의하지 않고 내버려 두심으로써 온유함을 나타내셨다(53:7).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 하시며,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는 온유를 보이셨다(벧전2:23). 십자가에 못 박던 자들을 대하던 예수님의 모습은 온유함의 절정이셨다.
온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라우테스’(prautes)이다. 이것은 야생동물의 성품을 일컫는 단어이다. 서부영화에서 보듯이 카우보이들이 야생마를 길들이는 장면들을 볼 수 있다. 아니면 로데오라고 해서 거친 들소를 길들이는 모습도 보게 된다. 결국 온유란 거칠고 난폭한 성품이 길들여져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성품으로 바뀌게 된 것을 말한다. 즉 ‘야성은 살아있지만 완벽히 길들여진 성품’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온유함이란 예수님의 다스림 속에 있는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온전한 다스림 속에 살아가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광야연단과정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마음과 행실이 정결케 되어 신의 성품(벧후1:4)에 참예하여야만 비로소 가능케 된다. 범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연단을 받아 바위덩어리와 같은 우리의 옛 자아들이 점진적으로 깨지면서 말씀에 완벽히 길들여진 성품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성경에는 자신의 성품과 악한 기질을 주님의 온유한 성품으로 길들인 분들이 많이 등장한다. 스데반에게 돌은 던지는 자들의 웃옷을 맡았던 사울에게,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을 향해 그리스도인에게 살기를 뿜으면서 말을 달리던 사울에게는 찬사를 보낼 수가 없다. 그는 증오와 혈기가 가득했다. 그러나 그의 증오가 사랑으로 바뀌었다. 바울은 “복음에 대한 야성(열정)은 항상 살아 움직였지만, 주님의 말씀에 완벽하게 길들여진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었다.
일곱 귀신 들린 창녀 막달리아 마리아는 음욕으로 길들여진 자신을 끊어버리는데치열한 영적싸움을 하여 마침내 거룩한 여인으로 거듭났다. 우레의 아들 야고보는 쉽게 분노하는 자신의 야성을 길들여, 가장 먼저 순교의 잔을 마신 아름다운 사도로 변화되었다. 그의 형제 요한 역시 사마리아 사람들의 비방에 금방 혈기를 내뿜었지만, 자기를 끊임없이 부인하며 사랑의 사도로 변화되었다. 자기 민족을 학대하는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라 살인까지 저질렀던 모세는 비난을 노여워하지 않고 참을 수 있는 온화한 사람으로 변화되었다(12:3). “지면에 있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단연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는 최고의 찬사까지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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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켄터키 주에서 태어난 존 그린 한닝(1849-1908)은 어렸을 때부터 불같은 성격을 지닌 소년이었다. 싸움을 좋아하고 반드시 앙갚음을 하는 거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16살 되던 해 아버지와 싸운 그는 ‘앙갚음을 해 주겠다’는 복수심으로 아버지의 담배 창고에 불을 지르고 가출까지 하였다.
그는 리우그란로 도망쳐 오랫동안 카우보이 생활을 하며 거친 서부의 사나이가 되었다. 9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그는 어머니의 온화함과 죽음을 통해 잃었던 신앙을 되찾게 되었고, 36살의 늦은 나이에 트라피스트 봉쇄수도원에 입회를 결심한다. 그때 주변의 사람들과 가족들조차 그의 불같은 성품과 기질로는 침묵을 지키며 수도원에서 생활할 수 없다고 코웃음을 쳤다. 그렇지만 그의 강한 고집은 누구도 꺾을 수가 없었다.
메리 요아킴 수사로 이름을 바꾼 그는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에게 건초 갈퀴를 휘둘러 앙갚음을 하려 하기도 하고, 설거지를 하다가 깬 접시 값을 보상하라는 원장에게 덤벼들기도 한다. 그러다가 마흔 살이 되던 어느 날 수염을 깎고 있는 그에게 원장이 “자네는 거만해. 언제쯤 겸손을 배울 것인가?”하고 질책하자 원장을 향해 면도칼을 휘두르며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까지 베어버리겠다”고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그러나 곧 찾아가 무릎 꿇고 빌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부끄럽습니다. 저의 기질, 저의 오만, 격렬한 피가 저를 망치고 말았습니다.”하고 용서를 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열정을 다해 온유한 주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였다. 끊임없는 자기 부정과 자기 기질에 대한 재갈을 물리며 하나님의 은총을 갈망하였다. 그러자 그의 야성은 주님의 온유한 성품으로 길들여져 갔고,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강한 열정으로 타올랐다. 마침내 그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어떠한 사람을 만나도 내적 평온을 항상 유지하며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불리게 되었다.
온유한 사람은 그릇된 일이나 부당하게 해를 입은 것에 대해 격앙되어 분노하는 일 없이 여호와께서 바로잡아 주실 때를 겸손히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이다(37:8-11). 또한 성령이 이끄시는 데로 자기를 부인하며 묵묵히 따라가는 사람들이며, 당시에는 근심스러워 보이더라도 그것을 기꺼이 인내하는 사람들이다(12:4-11). 이웃의 부족함을 부드러움과 온화함으로 넉넉히 품어주고, 비난과 모욕에도 겸손히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사람들이다. 나의 포악과 음란과 오만과 고집스러운 모난 성품이 주님의 온유한 성품으로 길들여지길 다시금 소망해 본다.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