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교향곡 속에서
숲에서 투명한 이슬과 맞는 아침은 눈부시다. 밤새 개 짖는 소리나 소쩍새의 울음에 잠깐씩 ‘주님…'을 부르며 잠을 설쳐도 이른 새벽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하루의 첫 시간을 드리러 가는 길은 매일 감격스럽다. 맑은 계곡수 소리는 부지런한 산새들의 창조주께 올리는 아침 찬양과 완벽하게 어우러진 숲의 교향곡이다. 감동적인 하루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은혜 속에 시작되는 것이다.

2시간의 예배 기도가 끝나면 검소한 식사와 대화가 있고, 설거지가 끝나면 기다렸던 오전 개인 경건 시간이다. 각자 원하는 곳으로 숨어 성경을 읽으며 주님의 사랑과 긍휼을 묵상한다. 완벽히 홀로 예수님을 만나는 아무 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침묵 시간이요, 일할 힘과 만날 사람들을 위한 사랑을 얻는 시간이다. 영적으로 채우지 않으면, 영혼에 주님 사랑과 은혜를 담지 않으면 곧 지치고 시험에 들기 때문이다.
그동안 주님 일을 한다면서 참 많이도 억지로 하려 애썼다. 담겨지지 않은 사랑을 쥐어짜느라 탈진했다. 그저 일만 하거나 지쳤다고 쉬기만 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 참 미련하고 게을렀다. 경건을 조금 흉내 내다 그만 중단하고 또 일한 성과로 자위하고, 진리를 증거 한다고 바쁘다고 갖은 핑계를 다 댔다. 계시록의 에베소교회 사자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으로 그럴듯한 설교도, “처음 사랑을 되찾자" 공허한 부흥회도 하였다.
이런 생활이 주님의 강권적 마지막(이는 개인적 긴박감이다) 긍휼로 다시 시작되어 화들짝 놀랐다. 교회를 처음 개척케 하셨을 때 축축한 지하실에서 가졌던 오전 시간의 검박한 영성생활을 언제부터 잃어버린 것인지. 맘속에 간절히 그리워하던 생활이 선교든 목회든 무엇을 하든 바로 이것이었다는 걸 확인하고는 참으로 송구했다. 집 나간 탕자의 아비처럼 주님은 얼마나 오래 참아 기다리신 것일까. 그 완전하신 사랑은 얼마나 크신 것인가.
사랑하는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절대 필수적이거늘 바쁜 일로 대체한다. 일하며 주님과 교제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수준에 들어가기 위해 이 시간은 절대 필요하다. 그래서 육체의 극심한 고통 중에도 여러 일들, 많은 상담을 해야 하셨던 선생님은 오전 경건의 시간을 결코 양보하지 않으셨다. 영성이 깊은 수도원들도 이 시간은 목숨을 걸듯 지켜왔다.
그런데 일이 점점 더 많아지면서 하나씩 둘씩 곶감 빼먹듯 경건 시간은 사라져갔다. 성무일과표는 먼지가 쌓이고 빛이 바랬다. 마음에 늘 부담이 있지만 일의 성과와 사람들의 만남 속에서 부러 잊었다. 강제로 명하신 기도원에서의 작정기도는 정말 말기 환자를 위한 극약처방이셨다. 얼마나 죄송한지,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얼마나 감미로운지….
오후엔 곳곳에 나의 영혼처럼 버려져 뒤엉켜있는 쓰레기더미를 치우고 맑은 영성원이 될 수 있도록 환경을 정리한다. 주님과 땀 흘려 봉사한다. 그리고는 한적한 숲으로 가 기도를 드린다. 저녁 식사 후엔 강의실이 열린다. 한두 시간 말씀을 나누고  연구하고 하루를 나눈다. 부딪침도 있고, 창피한 고백도 터진다. 회개기도를 드린 후 잠자리에 든다. 아, 계속되어도 좋을 이 생활은 또 무엇을 위한 준비일까.
주님은 정말 오래 참으시는 분이다. 정말 주님은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 전부를 갖기 원하시는 분이다. 숲의 교향곡처럼 영혼 속에도 사랑의 찬양이 울린다.                                
 
 박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