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광야 길에서 멈추지 않기를

 
어제 수도회 모임으로 충남 대천에 갔다가 올라오는 길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수도사님, 오랜만에요. 저 아시겠어요? 옛날 함께 신앙생활 하던 쫛쫛쫛입니다. 죄송해요. 제 삶이 너무 힘들고 어렵다 보니까 전화를 한다고 하면서도 지금까지 못하고 왔네요. 저는 지금 너무 힘들고 고달파서 염치 불구하고 전화를 했습니다. 이렇게 통화해도 돼요?” 그동안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 지금은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하여 견딜 수 없을 때가 많다고 어쩌면 좋으냐고 울면서 말씀하시는 데 도착할 때까지 통화를 하였다. 그 아픔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고 하는 말에,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싶은 마음에 목이 메고 가슴이 멍했다. 마음에 불을 끄고 혼자 어두컴컴한 곳에서 울고 있는 그분을 생각할 때 더 가슴이 아팠다.
어느 날 캘커타 뒷골목에서 마더 테레사는 한 노인의 허름한 집을 발견했다. 방에 들어가니 작은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실내는 청소를 한 번도 안 했는지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다. 옆에는 몇 년 동안 쓰지 않은 듯 한 먼지가 수북한 램프가 눈에 띄었다. “왜? 램프를 켜지 않으세요?”라고 여쭈어 보았더니 노인은 “누구를 위해 불을 켜느냐?”라고 되물었다. 아무도 찾아오질 않으니 불빛 같은 것은 없어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세상과 가족에게 버림받은 노인으로서 당연한 대답이었다. 마더 테레사는 “앞으로 내가 찾아오면 램프를 켜시겠어요?”라고 물었더니 노인은 “사람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기꺼이 켜주겠다.”고 답했다. 외로움에 절어버린 노인의 모습은 소외된 인간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육신이 풍족해도 마음이 가난해져 버린 세상이다. 굶주림보다 사랑에 목말라하며 신음하는 사람이 더 많다. 이러한 세상에 마더 테레사가 밝힌 한 자루의 촛불은 참으로 빛나고 아름다운 축복이다. 어둠을 탓하지 않고 한 자루의 촛불을 켜는 섬김을 나도 보여주고 싶다.
슬픔과 고통에 떨고 있는 한 형제에게 문병란 시인의 ‘희망가’ 라는 시를 전하고 싶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는 헤엄을 치고,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는 꽃망울을 튼다. 절망 속에서도 삶의 끈기는 희망을 찾고, 사막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오아시스의 그늘을 찾는다. 눈 덮인 겨울의 밭고랑에서도 보리는 뿌리를 뻗고 마늘은 빙점에서도 그 매운 맛 향기를 지닌다. 절망은 희망의 어머니 고통은 행복의 스승. 시련 없이 성취는 오지 않고 단련 없이 명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 꿈꾸는 자여, 어둠 속에서 멀리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긴 고행 길 멈추지 말라. 인생항로 파도는 높고 폭풍우 몰아쳐 배는 흔들려도 한 고비 지나면 구름 뒤 태양은 다시 뜨고 고요한 뱃길 순항의 내일이 꼭 찾아온다.”
우리가 신앙의 신비로운 빛을 받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깨닫고 보면 고난이 바로 성화와 완덕과 천국의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값진 재료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인 것이다. 신앙은 우리의 고난을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와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고난은 우리를 영원한 복락으로 인도하는 교량이 되고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고난 안에서 하나님과 긴밀한 일치를 맛보았다. 어쩌다가 고난이 없는 날에는 혹 주님이 버리신 것이 아닌가 싶어 “주님, 나에게 고난을 주소서.”하고 간절히 기도를 하였다. 사실 하나님과의 일치를 위하여 자기의 부유한 재산과 안락한 환경을 다 털어버리고 광야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수도자로서 일생을 보낸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고난이라면 치를 떨면서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그것을 피하려고 몸부림친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에는 다음과 같이 말이 있다. “십자가는 어디든지 있다. 어디로 가든지 만나게 된다. 마치 내 몸이 있는 곳에서는 내 그림자가 따라 다니듯이 십자가도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 다닌다. 물속의 고기처럼 사람마다 고통의 바다에 잠겨 살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누구나 고통을 싫어한다. 본성은 고통을 싫어하지만 그것을 피할 수는 절대로 없다. 현세에서는 고통 없는 낙원을 발견할 데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타락으로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욥은 또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무엇인가? 그 출생부터가 연약한 여인에게서 태어나 온갖 불운에 싸여 살다가 그림자처럼 지나가건만 그나마도 그 생애란 전쟁터의 악전고투가 아닌가?”
솔로몬 왕도 이렇게 말했다. “세상의 것은 우리 인간과 더불어 그 모두가 무생하여 헛되고 헛될 뿐이다. 하나님께 봉사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 외에는 다 헛되고 마는 것이다. 나는 해아래서 되어가는 모든 일을 다 살펴보았으나 그것은 죄다 괴로움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향락을 누리면서 그 괴로움을 잊어 보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의 고통만 더 했다.”
성 어거스틴도 “사람이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울음부터 터뜨린다. 이런 일은 장차 자기가 겪을 수많은 불운을 표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라고 하였다. 
현대의 신학자들도 고통을 부정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자가 없고, 고통을 없애려는 사람은 더욱 어리석은 자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릇된 고난 관에 빠지면 비관주의자들처럼 멸망으로 이끌려가고, 그 고통을 벗어나 보려고 향락을 추구하는 감각적 쾌락의 죄악으로 떨어져 간다.
우리 기독교의 전 체계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핵심은 그리스도의 구속도리에 있다. 그래서 사람이 겪은 모든 일들은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파악되어져야 한다. 우리가 겪은 온갖 고난까지도 구속의 섭리 안에서 포함시켜야 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신앙의 안목만 세워지면 우리의 고난은 다 십자가로 화해서 모든 성인들과 천국을 소망한 이들이 한결 같이 갈망했던 보물이 되어가는 것이다.
하나님께 바치는 사랑의 표지로서 우리가 고난을 참아 견디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를 위로하는 것으로서 고난을 참아 받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만약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당신을 위하여 고통을 달게 받고 사람들에게서 멸시와 천대를 받는 것 밖에는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고 하였다.
나의 스승도 “하나님 아버지시여, 건강이란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매우 중요한 기본적인 행복의 조건이 아닙니까? 아무리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명예와 권세가 높고 좋은 주택과 훌륭한 아내와 자녀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건강이 없다면 이 모든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제가 기본적인 행복의 조건이 되는 건강을 소유하지 않고 평생 누워서만 지내야 되는 것입니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하겠습니다. 그러나 리드비나 성녀와 같이 저에게도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로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 평생 병상에 누워서 살게 될 뿐만 아니라 지금보다 더 병세가 악화된다고 할지라도 항상 기쁨과 감사로 충만한 가운데 모든 고난을 이기면서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제 몸을 바칠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드리셨다. ‘하나님, 저에게 고난을 주시려거든 더 주십시오. 달게 받겠습니다.’라고 하며 40년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언제나 주님만을 바라보며 그렇게 사셨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긴 광야 길 멈추지 말라. 이 광야를 통과한 후 요단강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저 앞에 어른거린다. 다시 일어나 전진하세. 아무리 고난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아무리 이 세상이 우리를 괴롭게 해도 우리 주님 언제나 함께 하시니 다시 힘을 내어 우리 주님과 함께 저 천국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세.  

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