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쓰는 편지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갈대신경림


어머니의 인사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뤼순감옥에 갇혀있을 때, 그의 어머니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수의(壽衣)와 함께.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뤼순감옥에서 안중근 의사가 사형당했을 당시 나이가 31. 안중근 의사는 어머니의 편지를 받은 후, 천국에서 만나자는 가슴 아린 답을 보냈다.

안중근 의사는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가진 천주교인이었다. 그것도 독실한 믿음을 갖고 있는 신앙인이었다. 상당수 학자들은 안 의사의 의거는 천주교 신앙을 토대로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죽음을 맞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순국 보름 전 두 아우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빌렘(1860~1938) 신부에게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대한민국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 1910326일 순국 당일에도 뤼순(旅順)감옥에서 10분간 기도를 올리고 당당히 형장에 걸어 들어갔다고 한다.

이 세상 어느 어머니가 사형을 앞둔 자녀에게 이같이 말할 수 있을까.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고 하는 어머니와 천국에서 만나자고 답하는 아들은 각자 눈물을 삼키며 편지를 썼을 것 같다. 나도 가끔, 짐이 크고 무겁게 느껴질 때, 천국에 계신 어머니를 떠올리며 눈물에 젖을 때가 있다. 어머니가 사용하던 성경을 강단에서 설교할 때 사용하고 있는데, 가끔씩 형광펜으로 밑줄 그은 손때가 묻은 성경 구절들을 만날 때마다 약해진 마음이 다잡아진다. 어머니는 분명 천국에서 단호하게 말하고 있을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처럼. 조금 혹은 긴 시간을 지나왔기에 지쳤다고 생각하니. 때론 고독하고 울적하니. 딴 맘 먹지 말고 거기서 죽어야 한다. 우린 천국에서 만나자.


욜로 인생

누군가는 한번뿐인 인생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초연한 신앙적 자세로 죽어갔다. 그런데 요즘, ‘욜로(YOLO)’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신앙인들과 젊은이들을 미혹하고 있다. 신앙적 결단이나 거룩한 의지적 애씀, 혹은 영적인 사고와 거룩한 절제 등과는 전혀 다른 마인드다. 마귀가 세상을 향해 자신의 사상을 주입시키는 것 같다. 젊은 그리스도인, 청소년이나 청년들마저 이러한 마인드에 자연스레 동화되는 것을 보면서 영원한 것에 대한 진지함과 사모함이 주는 영적 힘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 안타깝고 사뭇 염려가 된다.

욜로는 요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 특히 젊은이들의 인생관을 정리해 주는 신조어이다. ‘인생은 한 번 뿐이다를 뜻하는 ‘You Only Live Once’의 앞 글자를 딴 용어로 현재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여 소비하는 태도를 말한다. 미래 또는 남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 현재의 행복을 위해 소비하는 라이프 스타일이다. 욜로족은 내 집 마련, 노후 준비보다 지금 당장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는 취미생활, 자기계발 등에 돈을 아낌없이 쓴다. 이들의 소비는 단순히 물욕을 채우는 것을 넘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과정에 있다는 점에서 충동구매와 구별된다. 예컨대 모아둔 목돈으로 전셋집을 얻는 대신 세계 여행을 떠나거나 취미생활에 한 달 월급만큼을 소비하는 것 등이 해당된다. 얼마나 마귀적이고 지극히 세속적인가. 나만 위해서 사는 인생관이면서 한탕주의나 이기적인 현실주의, 잘 먹고 잘사는 기복주의를 다 포함하고 있다. 성경과 위배되는 마귀적인 사상이 건전한 삶인 것인 냥,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영원한 세계에 대한 소망을 묘하게 가로막고 있다.

일찍이 사도바울도 믿는 우리에게 부활이 없고 천국이 없다면 우리 인생은 가장 가련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복되다. 영원한 천국이 예비되어 있고, 그것을 사모하며 나아가기 때문이다. 오늘 천국의 상 받기를 소망하며 절제하고 인내하며 사랑하는 것에 주님은 믿음을 더하여 주시고 영적으로 성장하게 도우시니 얼마나 큰 은총을 누리고 있단 말인가.

한번 뿐인 인생이 어떻게 사용될지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다. 지금 어떻게 살 것인가. 한번뿐인 인생이 절실하지 않은가. 그 인생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세상의 욜로 족들과 다르다고 외칠 수 있다면, 그들과 반대인 영원한 것에 성실하고 신실하게 사모함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그렇다면 확연한 삶의 차이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천국과 지옥의 차이기 때문이다.

 


상한 갈대여, 울라

파스칼은 팡세의 서두에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여기서 생각하는 갈대는 성경의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신다는 말씀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상한 갈대가 어떤 생각을 하고, 날마다 속으로 울어야 하는 이유를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주님의 자녀가 되고 말씀이 깨달아지니 울어야 하고, 그 말씀을 지켜야 하니 울어야 한다.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속울음을 울며 견뎌야 한다. 혼자가 아닌 이웃이 같이 가야 하니 불편하고 서로 부딪히며 아파야 하니 또 울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천국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가고 또 가야하고, 울고 또 울어야 한다. 상한 마음을 품고 날마다 울어야 한다. 그 울음은 회개가 되고 치유가 된다.

신약성경에 죄인인 여인이 눈물로 예수님 발을 씻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전부를 드리며 회개의 사랑 고백을 하였다. 상한 갈대였던 여인은 그렇게 예수님 발치에서 거룩한 사랑의 본질을 깨닫게 되었다.

상한마음이 치유되고 사랑의 마음으로 바뀌어야 주님의 은총이 임하고 거기서 새 일이 시작된다. 상한 갈대는, 예수님께 몸을 맡기며 치유받기를 구하는 자이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러나 상한 감정을 만 천하에 드러내며, 나에게 상처 입힌 누군가를 욕하고, 또는 누군가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나 상했소, 라고 떠들며 회개하지 않는 자, 치유받기를 거부하는 자에게 주님의 자비가 임할 수는 없다. 치유도 일어나지 않고 회복도 없기에 상한 갈대는 썩은 부분을 도려내야 할지도 모른다.

상한 갈대로 실망한 채 울기만 할 것인가. 상한 갈대로 소리 내며 아파만 할 것인가. 상한 갈대의 진실한 회개와 회복의 소망을 주님은 알고 계시고 기다리고 계신다. 꺾길 원치 않으시며 말이다. 상한 갈대인 누군가는 이 밤도 목숨을 내어놓고 절실하게 금식을 하거나 밤을 새우는 기도를 할지도 모른다. 또 상한 갈대인 누군가는 주님 때문에 욕을 당하거나 핍박을 받으며 순교적 신앙으로 견뎌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은 지금, 거룩한 자리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죄를 지은 것으로 넘어지지 말아야 한다. 죄인은 의인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죄 때문에 울며 고백하는 자리로 용기 있게 나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몸을 흔드는 것이 환경도, 이웃도, 그 무엇도 아닌 자신의 깊은 속울음 때문이어야 한다. 그 사람은 소망이 있는 사람이다. 날마다 속울음을 발견하는 자는 은총을 입은 자이고 희락은 오래 견딘 후에 열매로 나타난다. 죄를 고백한 후에 가장 깨끗하고 맑음으로 우리에게 평안을 선물한다.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