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몫을 속히 감당하라

현대인의 사() 무주의란 것이 있다. 무감동, 무책임, 무관심, 무목적이다. 장터에 앉아 동무들에게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 치지 않는 비정한 시대다. 옆집 노인이 홀로 죽어 여러 날 되었는데도 까맣게 모르는 이기적인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뺑소니차에 치어 숨진 아들을 서글퍼하는 아버지가 “목격자를 찾습니다. 후사하겠습니다.” 대문짝만하게 길가에 플래카드를 걸어 놓아도 모두 다 입을 다문다. 불려 다니며 시비에 말려들까 귀찮아서다. 반응 없는 군중을 보신 예수님이 “귀 있는 자는 들어라.” 연거푸 질책하신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아.” 하며 이사야는 통곡하며 울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몫을 포기한 채 물결 따라 흐르는 맹목적 삶을 사고 있다.

먼저 회개의 몫을 찾아야 한다. 길선주 장로가 평양 장대현교회 사경회 마지막 날 밤 “나는 아간입니다. 고인된 친구 부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100불을 훔쳤습니다. 내일 아침 갚겠습니다.” 청중 앞에 흐느끼며 자복했을 때 온 나라에 부흥의 바람을 일으키는 태풍이 시작되었다. 반면에 회개의 몫을 지불치 않고 외면한 아간은 아이 성 싸움에 참패를 가져왔고 자신과 가족들이 모조리 죽임당하는 비극을 만들었다.

“나의 연고로 이 풍랑이 일었습니다. 나를 바다에 던지십시오”(1:12). 요나의 희생적 결단이 있을 때 폭풍은 즉시 멈추고 선객 모두 안전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당신은 회개할 몫이 없는가? 길거리에서 잠자려는 나그네를 찾아가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모든 쓸 것은 나의 담책이니 거리에서는 자지 말라.(19:20)고 하며 자기 집에 숙식을 책임진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노인을 지금도 필요로 하고 있다.

“와서 우리를 도우라.(16:9)는 마게도냐 사람들의 절규를 계속 외면하겠는가? 일생에 의사 한 번 만난 일도 없고 치료 한 번 받지 못한 사람들,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채 사악한 주술사에게 괴롭힘 당하는 미개한 종족들, 굶고 또 굶어 평균 연령 40세도 못 되는 기아에 지친 빈민국 사람들, 이들을 책임져야 할 몫은 누구에게 있는가? 당신만은 외면할 떳떳한 이유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내가 책임지고 구원해야 할 친척이나 친구의 영혼을 구원치 않은 직무 유기죄로 그 피 값을 몰라 하실 때(3:18)에 차라리 피 값을 지불할 무서운 각오로 이렇게도 태만한가? 일꾼이 없어서 안타까워하는 애절한 일꾼 모집 광고를 번번이 거절한 배짱은 어디서 배운 객기인가?

심판 날이 다가온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25:26) 주님의 면책을 들어서는 안 된다. 마땅히 감당해야 할 그 몫을 분배 받아라. 권리의 몫 말고 의무 말이다. 주님 주시는 상은 달콤하다. “주님! 해봤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동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