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짱이 되자

요즘 현대인들은 외모에 관심이 많다보니 시쳇말로 얼짱, 몸짱이라는 표현을 잘 쓴다. 이를 위해 무리해서 전신 성형수술을 감행하기도 하고, 자연적인 아름다움보다 주름을 제거하기 위해 보톡스를 수없이 맞아 부작용이 생기기도 하고, 몸의 지방을 수술로 제거하기도 하고, 명품을 좋아하다 카드빚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이도 있다. 외모를 가꾸기 위해서 수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지만, 정작 맘짱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내면의 향기를 찾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어버렸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치중하는 이 시대의 어리석음을 요한 마가는 잘 꼬집은 듯하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7:20-23).

외적인 것들보다 내 마음 안에 들어 있는 더럽고 추한 것을 제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공중권세를 잡은 마귀는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눈을 가려버리고 외적인 것에만 몰두하도록 이끈다. 마귀는 자신을 그럴 듯하게 숨기면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자신을 노출하지 않을뿐더러 달콤하게 다가온다.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죄로 물들인다. 마귀는 이 땅이 영원할 것처럼 우리를 간사하게 속이며 속사람보다 후패할 겉사람을 꾸미고 단장하라고 계속 부추긴다. 우리 모두는 외모보다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을 잘 준비해야 한다. 얼짱, 몸짱이 아닌 내면을 가꾸는 데 애를 써야 한다. 맘짱이 되어야 한다.

맘짱이 되는 데 기초석은 겸손일 것이다. 겸손은 모든 덕을 꿰는 구슬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천사들을 악마들로 바꾼 것은 교만이었고, 사람들을 천사들로 만드는 것은 겸손이다. 교만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 중에서도 으뜸이다. 교만의 원조가 마귀이기 때문이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 수 없다. 외모지상주의에 빠지는 것도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위배되는 교만의 한 줄기다.

바실레이아 슐링크는 그의 저서에서 교만의 죄가 어떠한 것인지 자세하게 언급하였다.

자신에게는 관심을 가져주지도 않고, 막 대하던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관심과 존경을 표할 때 우리는 괴로워한다. 뛰어난 재능이나 자질이 없고 인격도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면 상심한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를 꾸짖거나 굴욕감을 안겨주면 분노한다. 내가 조직이나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결정권자의 입장에 서지 못하면 실망한다.

우리는 자신의 재능과 교육 수준과 능력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할 때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 일을 처리하는 데 필요한 교육이나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했을 때 낙심한다.

부모의 교육 수준이 낮거나 높은 지위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을 때도 상심한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겪으면 우울하고 불행해지며 외부 환경을 탓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의 깊은 속마음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이런 분노와 상심과 실망의 뿌리가 우리의 교만이라는 것은 깨닫지 못한다. 이럴 때 우리는 비판을 참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는다.

심지어 내가 어떻게든 혼자서 이 일을 해결해야 한다.’라는 태도를 고수하는 것이 겸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실상은 우리의 마음이 깊은 교만에 사로잡혀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 해결을 위한 도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유난히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인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심어주기 원하는 마음도 감춰진 교만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평판에 너무 예민하다. 교만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오직 하나님의 성령께서 빛을 비춰주실 때라야 그것들을 보게 된다.”

사람들의 평판이 두려워 나의 본 모습을 의복으로, 외모로 가리려고 하지는 않는가. 나를 향한 평가는 겉모습으로 측정되는 게 아니다. 내면이 얼마나 잘 가꾸어져 있느냐에 달려 있다. 내 영적 삶을 죽이고 삶의 모든 것을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 허영과 거짓된 교만을 멀리하자. 세상 잣대의 껍질을 훌훌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 자신을 낮추자. 자신을 철저히 낮출 때에야 비로소 상대방이 나를 경시하고 무시해도 평온할 수 있다. 또한 외적인 초라함에도 부끄러워하거나 굴하지 않을 수 있다.

겸손의 모범이신 예수님을 따라 자발적으로 자신을 낮춰야 한다. 어떤 직함이나 존경 같은 것은 가능한 한 받지 않도록 하고, 남들보다 뛰어난 존재가 되거나 명예로운 지위에 오르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기회를 봐서 뒤로 물러나 다른 이들이 명예를 얻도록 해야 한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올 때 잠잠히 있고, 자신의 죄와 실수를 인정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굴욕감을 감수할 때 교만의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초대 한국교회가 신분의 차이로 인한 갈등들이 표출되고 있을 때 전라도 김제에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김제 지역의 거부 조덕삼(1867-1919)은 최의덕 선교사의 전도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되자, 집에서 머슴살이하던 이자익을 전도하여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다. 17세 때부터 머슴살이하던 이자익은 조덕삼의 선처로 결혼도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1905년 함께 세례를 받고 곧 이어 함께 집사가 되고 영수가 되었다.

1907년 장로 선거가 있었다. 조덕삼은 김제의 최고 갑부였고, 교회 지을 땅을 헌물하였고, 교회 재정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동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소작농이었고, 나이도 이자익보다 15년이나 연장자였다. 그런데 공교롭게 둘 모두 장로 후보에 똑같이 올랐다. 모든 사람들은 조덕삼이 장로가 될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투표결과는 의외였다. 이자익이 장로가 된 것이다. 모두 당황하여 술렁거리기 시작할 때 그는 일어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금산교회는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더욱 교회를 잘 섬기겠습니다.” 인사치레의 말이 아니었다. 죽을 때까지 이자익 장로를 지지하고 후원해주었다. 1909년 장로가 된 조덕삼은 이자익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5년간 공부할 때도 모든 학자금과 생활비 일체를 지원해주었다. 또한 이자익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하여 잘 받들었고 삼대째 금산교회를 섬겼다. “예수님 안에는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다. 모든 죄성이 제거된 사람이 들어가는 거룩한 나라다. 땅의 것을 취하며 가꾸기보다 내면을 충실히 들여다보는 맘짱이 되어야 한다, 마음과 행실을 정결하게 씻어 심령천국을 이룰 때까지.

박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