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웃는 자들에게

오 감미로워라 가난한 내 맘에

한 없이 샘솟는 정결한 사랑

오 감미로워라 나 외롭지 않고

온 세상 만물 향기와 빛으로

피조물의 기쁨 찬미하는 여기

지극히 작은 이 몸 있음을

오 아름다워라 저 하늘의 별들

형님인 태양과 누님인 달은

오 아름다워라 어머니신 땅과

과일과 꽃들 바람과 불

갖가지 생명 적시는 물결

이 모든 신비가 주 찬미 찬미로

사랑의 내 주님을 노래 부른다.

-성 프란치스꼬의 노래 중에서

 

인스턴트 시대, 오늘만 살다

3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세월호 사건, 대통령의 파면과 구속,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 때문에 대형마트를 돌며 분유와 기저귀, 옷 등을 훔친 30대 가장, 구의역에서 안전점검하다 사고로 죽은 젊은이, 몇 푼의 돈을 벌기위해 일하다 용광로에 떨어져 죽은 청년, 유독가스 유출로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고통 속에 죽은 청춘 등 우리가 사는 시대의 메마름이 극의 극을 넘나들고 있다. 가볍고 천박한 것들이 즐비하고 두려운 것들이 없는 시대가 되었다. 악은 점점 더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고 있으며, 옳고 그름의 기준이 모호해지고 사람들은 각각의 소견들로 목소리를 높인다. 물질의 힘이 전부인 물질세계의 비애일까. 교회들도 물질을 기준으로 큰 교회, 작은 교회가 나뉘고 성도들도 거기에 휩쓸려 크고 화려한 교회들로 종교 활동을 하러 간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쓸데없는 문명의 이기를 당연하게 누리며 감각적이고 편리한 것들을 교회에 끌어들여 주의 일을 희석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한번 쓰고 버리면 되는 편리한 세상, 일회용이 보편화된 세상이다. 인스턴트식 사랑이라는 말로 지고지순한 감정을 폄하하여 정의하고, 일회용을 생각 없이, 당연하게 사용하고 버리는 게으름을 인스턴트 세상의 편리함으로 정의하며 당연시 여긴다.

무겁고, 깊이 있고, 단순하지 않은 주의 말씀들과 천국 가는 길, 주님 안에서의 인간관계, 주님 나라의 일들을 생각하면, 이 모든 세상의 가벼움에 깊은 한숨이 절로 나온다.

매일 성경을 읽거나 묵상하지는 않아도, 개인 통신망들은 매일 보고, 점검하고, 꾸미고, 또 자신의 감정들을 드러내는 일을 하는 세상 사람들 혹은 주님의 백성들. 말씀에 의지하여 나아가는 것보다 뉴스에 흔들리며, 사람들에 의해 이리저리 선동되고 이끌림을 당하는 시대. 우리가 사는 시대는 주님이 주신 엄청난 시험의 시대임에 틀림없다.


무엇을 따를 것인가

어제 일 같이 마음 아픈 일들이 오늘 다시 아무렇지 않고, 오늘은 죽을 것 같은 일들도 내일이면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 그만큼 시대는 빠르게 흐르고 있고 우리의 정신은 시대를 닮아가는 것만 같다. 한마디로 이 시대는 영원한 것이 없다. 즉흥적이고 감각적이고 감정에 충실하며 물질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 달콤한 세상이 되었다. 거기에 빠른 교통수단과 지식의 발달은 인간의 기다림을 조급함으로 바꾸어 주었고, 분주하고 바쁜 것이 미덕이 되고 말았다. 오래 참고 인내하면서 더 깊게, 혹은 더 많이 자신을 보고 상황을 이해하는 깊음이 사라지고. 빠르게 판단하고 결정하여 적용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성경의 말씀들은 결코 가볍지가 않은데, 말씀을 지키려면 더 깊은 묵상과 인내와 사랑과 용서가 뒤따라야 하는 것인데, 가볍고 편리한 인스턴트의 시대에 익숙해져서 어떻게 말씀의 깊이를 이해하며 따라갈 수 있을까 사뭇 걱정이 된다. 자라나는 어린 영혼들은 더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재미있고 감각적이지 않으면 교회도 외면을 당하는 시대다.

우리교회에 나오는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전도사님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저는 크면 수정교회 안 다닐 거예요. 재미가 없어요.” 이에 대한 전도사님의 답도 만만치가 않았다. “지원아, 교회는 재미로 다니는 곳이 아니란다. 말씀은 재미가 있고 없고가 아니라 지키고 안 지키고의 일이란다. 그러니까 재미라는 말로 교회를 선택하면 안돼요.”

얘기를 듣고 웃었지만 아이의 말이 주는 재미는 무엇일까. 기분 좋고 기쁜 일, 혹은 마음을 끄는 즐거움을 말하는 것일진대, 말씀은 그와 정반대의 경우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갈수록 재미가 요구된다면 교회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무교병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해야 성경적이고,  진리의  빛 진리의 말씀을 전해야 마땅한데 말이다.

어느 때는 맑은 순수함이 재미를 떨어뜨리고, 무교병의 말씀이 심령에 거북함을 주고, 어두운 것들을 들춰내면 그 자리를 떠나고 싶어 질텐데 교회는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갈수록 성도는 줄고, 세상은 더 악해지고,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강퍅하여 자기들의 편리함으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할 텐데, 그 많은 짐을 떠안은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야 할까.


영원한 것을 위하여

잠시 기억을 끄집어 내 본다. 교회를 개척한지 3년째에 접어든다. 개척하면서 교회 목표 중 하나가 작은 교회였다. 겸손함과 깨끗함을 유지하자는 의미였다. 밝은 빛, 맑은 물, 무교병의 말씀을 전하고, 영적인 성장에 더 목표를 두는 교회를 지향하고자 함이었다. 속으로는 그래도 주님이 어느 정도 부흥은 시켜 주시겠지 내심 기대했건만, 주님은 인내의 말씀을 지키며 견디라고 새로운 성도들을 보내 주시지는 않는다. 그 가운데 바라보는 것은 영원한 것뿐이다. 지금 교회와 목회자인 나의 유일한 희망은 교회도, 성도도 아닌 영원하신 주님의 말씀과 나라 뿐이다. 그것이 없다면 지금의 현실은 두렵고 암담할 일이다. 목회자가 되었기에 포기 한 것들과 앞으로도 포기해야 할 많은 것들이 가련하고 잘못된 일이 되고 한없이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가장 어리석은 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던 사도바울의 심정과 비슷할 지도 모르겠다.

주일날, 성도들이 먹을 콩나물밥을 해 보겠다고 미혼인 남자 전도사님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예배 후, 다들 전도사님이 한 콩나물밥을 먹는가보다 기대하며 밥통의 뚜껑을 열었는데, 한쪽은 익고, 한쪽은 덜 익은 밥이 콩나물과 함께 우리를 보고 있었다. 다시 취사를 누르고 10여분이 지난 후 뚜껑을 열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덜 익은 밥을 간장에 비벼 먹으며 다들 웃고 말았지만, 1년 여 전의 기억이 떠올라 혼자 웃었다. 성도들을 위해 밥을 해보겠다며 매주 손쉬운 카레를 하곤 했었다. 매주 카레를 먹었더니 나중에는 성도 중 한분이 카레를 그만 먹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쉽다는 콩나물밥을 도전 했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전도사님의 경우처럼 다 된 줄 알았더니 덜 익어서 세 번을 취사만 누르다가 콩나물죽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 뒤로 우리 교회는 아직도 카레밥을 먹지 않고 있는데, 콩나물밥도 먹지 않을 메뉴로 추가 될 것 같다. 이 모든 일을 주님이 어떻게 보실까 생각해 본다. 밥을 맛있게 먹지 않으면 어떤가. 은혜요 주님 안에서의 작은 교제와 기쁨이 되는 일이다. 영원히 이렇게 이 땅에서 살 일이 없기에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는 것이다.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6:24-26).

부족하고, 가난하고, 연약하고, 미흡하고, 실수해도 우리는 주의 자녀고 교회는 주님의 교회다. 연약함을 위하여 빌어주시는 성령님이 계시고, 가난함을 위해 청빈을 말씀해 주시는 믿음의 선진들이 있다. 실수해서 얻어지는 교훈을 알려주시는 주님의 은총이 있고, 부족한 인격으로 인해 울고 아파할 때, 기도하는 격려하는 동료들이 있다.

지금 웃는 자가 행복한 것이 아니다. 영원한 것을 소망하며 오늘 애통하고, 주리고, 핍박을 받는 자들이 행복한 것이다. 영원한 것은 주님뿐, 그분의 것이 되기 위해 우리가 살고 있다.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