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없는 삶


b9aec1d8b0e6.png 얼마 전 펑크가 났는지 타이어가 한쪽으로 푹 기울어져 있었다. 화들짝 놀라 서비스센터에 연락을 하니 10분정도 지나서 기사아저씨가 도착을 하셨다. 보시더니 너무 닳아서 교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스페어타이어로 교체하고자 나사를 빼는데, 나사가 누렇게 녹이 슬어 있었다. 문득“나는 녹슬어 없어지기보다는 닳아서 없어지길 원한다.” 라는 죠지 휫필드의 말씀이 떠올랐다. 이어서 몇 주 전에 다녀왔던 95%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천사의 섬, 증도에서 피와 땀을 흘린 한분의 삶이 되짚어졌다.

닳아 없어지는 그날까지

증도가 주는 첫인상은 천사의 섬이라는 푯말로 시작되었다. 종려나무 가로수와 이곳저곳에서 양파를 거두는 손길도 눈에 띄었다. 벗겨도 똑같은 모습을 한 양파처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거센 파도가 치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가시밭길을 걸으셨던 한 여인의 삶이 게으르고 태만한 나를 무척이나 부끄럽게 하였다. 섬 교회의 어머니로 불린 문준경 전도사님(1891-1950). 종려나무의 환희보다는 숨겨진 밑거름이기를 원하셨던 그녀는 세상에 익히 알려지지 않은 순교자 중 한 분이시다.

원래 친정도 시집도 꽤 잘 사는 집안이었지만, 17살 때 시집가는 결혼 초야부터 버림을 받았다. 남편이 다른 섬에서 소실을 얻고 살림하면서 세상에서는 잊힌 여인으로 살아야 했다. 그러나 남편 없는 시집살이 20년, 길쌈하고 바느질하면서 극진히 시부모님을 모셨다. 불쌍한 딸자식처럼 측은하게 사랑해주었던 시아버지가 그녀에게 글을 가르쳐 주었다. 땅바닥에 쓰고 지우며 글을 익혔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20년 시집생활을 청산하고 손재봉틀 하나를 가지고 도시로 올라왔다.

그 무렵 이성봉 목사님의 부흥성회가 불이 붙은 때였는데, 그 성회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그 나이 37세 때였다. 이후 피눈물 나는 고학으로 경성성서학원(성결교단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였다. 바늘 장수, 물장수, 삯바느질,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그녀의 기숙사 방은 ‘사랑방’으로 소문이 나서 많은 재학생들이 어머니처럼 따랐다. 한번은 병든 홀어머니 때문에 울고 있는 여학생을 보고 단 하나의 재산인 재봉틀을 주었다.

초등학교도 다닌 일이 없고, 도레미파를 배운 적도 없지만, 특유의 낭랑한 목청으로 당시 많이 부르던 허사가를 부르면 동네 여인들과 어린이들이 다 모여 들었다. 그러면 일장 전도설교를 시작하였다.

11개의 섬을 24시간 이 섬에서 저 섬으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나룻배로 건너다녔다. 그녀의 발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지나가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섬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증인이요 편지였다. 1년에 고무신 9켤레가 다 헤어질 정도였다.

그녀의 집은 귀신들린 여인, 반신불수 되어 오갈 데 없는 사람들 등. 버려진 여인들의 숙소였다. 대소변을 받아내느라 방에서는 악취가 날 정도였다. 밤낮을 교회에서 살면서 새벽같이 큰 가방을 들쳐 메고 나가 누룽지나 잔칫집, 제삿집 음식을 걷어서 가난한 집에 나눠주었다. 큰 가방 속은 감기약이나 연고, 민간 비상약 같은 것 등이 채워져 있어서 병자들을 심방하며 부담 없이 약을 먹이고 발라주고 기도해주었다. 모두의 가난과 고통에 자기 피부를 맞대고 살았다.

일제강점기 마을에 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전염이 무서워 버려진 환자들을 가족들조차 시체 치우는 일을 기피했는데, “나는 어차피 홀몸이니 죽어도 부담이 없다”며 환자를 돌보고 시체를 매장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그 마을의 사제(司祭)였고, 간호사, 산파, 목자, 만인의 어머니였다.

중동리교회를 세울 때에는 성도들과 함께 한 달 동안 목재와 기와를 이어 나르고, 터 닦고 흙 일구느라 손발이 터졌다. 방충리, 우전리, 병풍리, 진리, 재원 등 많은 교회들이 그녀의 몸으로 세워졌다. 무려 52개에 달했다.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기 위해 피와 땀을 아끼지 않으셨던 그녀는 몇 번이나 과로로 쓰러졌다.

1950년 10월 5일 “새끼 많이 깐 씨암탉”이라는 죄목으로 공산당에 의해 모래밭 사형장으로 끌려간 그녀는 죽창에 찔리고 발길에 채이며 59세의 나이로 “오 주여! 죄 많은 영혼을 받아주소서”라는 기도를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헛되고 헛된 세상을 등지고 살아라

17살에 한센 병이 걸려 가족과 고향을 떠나 혈혈단신 소록도로 왔지만, 47년이 지나도록 단 한 번도 이 병으로 인하여 후회를 해 본 적이 없다고 하셨던 한 장로님의 고백과 같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헌신하였던 문준경 전도사님처럼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다.

헛되고 헛된 이 세상 부귀영화 누리고 산들 무슨 가치가 있으랴. 언제까지 아등바등하며 이 땅의 부귀와 공명을 좇으며 헛된 삶을 살아갈 것인가? 솔로몬의 영광도 들에 핀 백합꽃보다 못하거늘, 언제까지 이 세상의 쾌락을 즐기며 살아갈 것인가? 녹이 슬어 낡아져 없어지는 초라한 인생에 언제까지 발목이 붙들려 살아갈 것인가? 헛되고 헛된 세상에 미련을 못 버리는 가련하고 초라한 내 영혼에 허사가가 들려지는 듯하다.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공명 장수는 탐내지 마오. 고대광실 높은 집 문전옥답도 우리 한번 죽으면 일장의 춘몽. 인생백년 살아도 걱정근심뿐 세상행복무언가 신기루라네. 이 세상의 쾌락을 즐겨보아도 남는 것은 후회와 탄식뿐이라. 홍안소년 미인들아 자랑치 말고 영웅호걸 열사들아 뽐내지 마라. 유수 같은 세월은 빠르게 흘러 적막한 공동묘지 널 기다린다.”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그분들 앞에 무엇을 뽐내고 무엇을 자랑할 수 있으랴! 더 좋은 주택, 더 좋은 환경, 더 좋은 옷을 입은 들 무슨 소용 있으랴. 다 낡아 없어질 것이거늘. 아, 참으로 가련하고 불쌍하도다. 손해 보기 싫어하고, 희생하기 싫어하고, 고통 받기 싫어하고, 십자가를 멀리하는 인생이여! 통탄하며 울지어다. 어디선가 헛되고 헛된 세상을 등지고 살라는 무언의 외침이 들려오는 듯하다.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