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뭇사람과 죄인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자 나온 사람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19:7). 그들의 이름을 성경은 뭇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전적 뜻은 여러 사람 혹은 많은 사람이지만, 성경의 정황으로 볼 때 뭇사람들은, 유대의 선민의식 속에 율법에 의거한 삶을 산다고 자부하던 무리들이었다.

그런데 그들 앞에 어느 날부터 예수님이 나타났다. 뭔가 오묘하고 그럴듯한 말을 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보려고 여리고성에 입성할 때부터 따라다니며 몰려다니던 중이었다. 예수님을 보는 일은 흥미로웠지만 그 말대로 살 용기는 없었다. 말씀에 힘은 있었으나 도덕과 상식을 넘다 못해 유대인의 품위에 도저히 맞지 않는 이상한 논리와 역설들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 던 중 결정적인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뭇사람들이 보니, 죄인이라고 규정해 놓은 삭개오의 집에 예수님이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자신들이 개같이 여겼던 삭개오를 예수님이 사랑하는 일은 몹시 못마땅하고 불편한 상황으로 다가왔다. ‘말도 안 돼! 우리가 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을 왜? 우리 무리와만 어울리고 우리에게만 교훈을 이야기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인데 말이야.’

그러나 그들이 정작 보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예수님이 다가갔을 때 죄인인 삭개오는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하며 영접했으나, 그들은 회개하는 죄인과 그 죄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비난하고 판단하며 스스로가 죄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율법이라는 틀을 지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사랑하는 법을 모르고 사랑하는 이들을 판단만 하고 있는 꼴이 된 것이다. 우리의 입으로 법이요하는 순간부터 상대방은 죄인이 되고, 나는 정의를 얻게 되는 과정이 된 것이다. 그러니 법은 나를 높여주는 수단이고, 내 우월함을 충족시키는 좋은 도구가 되는 셈이다. 하나님이 없는 법은 그렇게 우리 속에 깊숙이 침투해서 우리를 타락시키고 우리의 교만을 충족시킨다. 뭇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낯설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예수님은 삭개오 안에 담긴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먼저 보셨다. 그래서 선포하신 것이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주변에 있던 뭇사람도 들어야 하는 말인 것은, “너희들이 정죄한 이 사람마저도 나는 사랑할 수 있다.”라는 뜻으로 보인다.

저 사람은 안 돼. 우리와 뜻이 달라. 나와 다른 단체의 사람이야. 우리 무리를 반대해. 나눠주기 싫어. 우리가 높임을 받아야 해. 우리 단체가, 내가, 이익을 얻어야만 해.’

바로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들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남을 사랑하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내 눈에 보이는 대로 분별하고 죄인으로 판단하고 내 마음대로 미워하는 가증함. 주님께서 사랑하겠다고 하시는 그 일을 감히 내가 막아서는 것은 주님께 더욱 용서를 구할 일이다.

숨어서 피는 꽃

오늘날은 과학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저마다 나를 드러내기 좋아하는 다소 경박한 심리들이 만연한 시대다. 당당하고 쿨한 사고로 여김 받는 세태의 사고는, 점점 성경과 멀어지고 악한 속삭임에 자신의 외모와 인격을 천박하게 만들어 가는 중이다.

왼손이 하는 일은 오른손이 알려야 하고, 은밀한 기도보다는 입으로 떠드는 것이 시원하기만 하다. 드러내고 말하고, 행동하고 말하고, 또 말하고 드러내는 천박한 나날들. 은밀히 행하는 덕과 사랑은, 우리의 처세술과 교만하고 이기적인 욕망 앞에 빛을 잃고 어둠속을 헤매고 있는 중이다.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등불이지 과시욕이나 명예가 아닌데 말이다.

그러다보니 항상 초조와 불안에 쫓기고 무언가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진정한 자유함이 없이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나는 빛을 발해야 해. 적어도 나의 직분은 이러한 모습으로 비춰져야 해.’ 선한 동기보다 보여야 하는 스트레스에 자신도 모르게 시달리고 있기도 한다.

주님만 아시면 되는 것이 아니라, 동료도 성도들도 알아야 하고, 내 가족들도 나를 인정해 주도록 해야 하는 부담감. 보여주기 위한 덕과 사랑을 실천하려고 허리가 휘고 다리가 찢어지는 부작용이 생기기도 한다. 아예 포기를 하기도 한다. 골방에 들어가 나와 대면하자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권면은 직분과 나이, 명예 앞에서 가차 없이 무너지고, 나는 내가 하는 일들이 의지적인 노력과 형식에 이끌림인지, 중심에 선함을 가진 애씀인지를 분별하지 못한 채, 세월과 더불어 타성에 젖어만 간다.

누가 보지 않아도 되는 자유함이 없어졌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되는 은밀한 은혜가 서운하다. 나만 하는 것 같은 책임감이 부담스럽다. 내 맘에 들지 않는 이웃이나 뭇사람들이, 단체가 불편하고 맘에 들지 않는다. 불만이 쌓이고 일에 흥미가 없어진다. 나만 고생하는 것 같고 주님에게 원망이 가면서 사명마저도 흔들린다. 누구를 위한 일이고, 누구를 위한 마음이고 누구를 위한 삶이란 말인가.

내가 네 안에, 네가 내 안에 있는 그날까지, 우리는 숨어서 피는 꽃처럼 오직 주님 한분을 위해 불태워져야 할 사명을 받은 이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런데, ‘뭇사람들에 휩쓸리거나 스스로 뭇사람이 되어서 누군가를 죄인으로 만드는 악을 범하기도 한다. 혹은 스스로 죄인이 되어 자책하느라 아무 일도 못하고 낙망하고 슬퍼하며 주저앉기도 한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는가.

꽃은 언제인지 모르나 피고 진다.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핀다. ‘나 피는 중이니 어떻게 피는지 봐 주세요.’ ‘나 이제 다 피었으니 향기 좀 맡아봐요,’ 혹은 내가 피는 동안 도와주지 않은 주인과 동료들을 혼내주세요.’라고 말하는 적이 없다. 말없이 피고 또 말없이 질뿐이다.

절망하고 희망하라

나의 하나님, 나는 악만을 저질렀습니다. 나는 악에 동의치 않고 그것을 사랑할 수도 없었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쓰라린 공허를 느끼게 하였고 나로 하여금 그제야 비로소 슬픔을 맛보게 하였습니다. 그 슬픔은 나를 온통 벙어리로 만들었으며 사람들이 축제와 향연을 벌일 때면 더욱 끈질기게 나를 괴롭혔습니다. 내가 베푸는 파티에서도 한순간이 지나면 오히려 깊은 침묵에 빠졌고 마침내는 모든 것이 역겨워졌습니다”(샤를 드 푸코의 글 중).

나에게 다가온 주님은 언제나 사랑이셨고, 용서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셨다. 주님은 나 아닌 모두에게도 늘 그런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을 보았다.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오히려 깊은 악으로 절망할 때나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주저앉을 때, 성령 하나님께서는 거기가 시작하는 자리가 될 수 있다고 격려해 주시곤 했다.

내가 부르고 높여야 할 단 하나의 이름인 예수님은 그 이름에 능력이 있다. 온 천하 만민이 우러러 경배할 대상이시며 마귀가 놀라서 물러가는 이름이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그리스도이시다.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고 다시 오시는 그때에는 죄와 불행을 영원히 심판하고 영원한 나라로 우리를 인도하실 이름이다. 세상의 처음과 끝이 그 이름에 있다. 그 이름을 믿는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그의 자녀가 되어 그 이름을 위해 살고 죽는, 예수님의 것이다.

그 이름을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으며, 그 이름을 힘입어 나아가는 자는 의로운 해가 떠오름 같은 치료와 생명의 능력을 결국은 받게 될 것이다. 죄로 인해 더 깊이, 많이 절망하는 것은 긍휼을 입는 축복이다. 하지만 죄인이 되어 죄인으로 머물다 죽지 말고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는 그의 권세 있는 자녀로 다시 소망하고 일어서라. 꽃처럼 피어나면서 웃고, 꽃처럼 숨어서 홀로 울라. 그리고 예수님만 깊이 사랑하라. 잊지 말 것은, 너는 주님의 꽃이요, 주님은 너의 상급이다.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