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행복한 소금

 
대사경회가 코로나19로 인해 진퇴양난에 놓였을 때, 지방에서 한 권사님이 오셨다. “아니, 이 추운 날 몸도 어려우신데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인사를 드리자 “목사님, 정말로 반갑습니다. 1년 동안 집에만 있으니까 너무 갑갑해서 못살겠어요. 애들이 가지 말라고 난리법석을 피우는데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어차피 죽을 몸뚱이인데, 이번 사경회 때 밥하다가 죽으려고 왔어요.
몇 년 동안 암 투병생활을 해오시던 P권사님께서 몸을 사리지 않으시고 주방에서 밤낮으로 봉사를 하셨다. 함께 일을 하시던 분들이 좀 쉬었다 하라고 하셔도 “나는 일할 때가 제일 좋고 행복해요.”하시며 소탈한 웃음을 지으신다. 독한 약을 복용하시면서도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권사님을 통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말씀이 더 깊이 체감되어졌다.

“희생하려는 마음이 있을 때 하나님은 은총을 내리십니다. 자기희생과 고난이 없이 은혜 받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려면 반드시 큰 희생이 따릅니다.”라는 나의 영적 스승님의 말씀처럼 소금은 녹아질 때 제 맛을 낸다. 녹지 않으면 맛을 낼 수도 부패를 방지할 수도 없다. 녹아지는, 희생 없이는 소금의 맛을 낼 수가 없다. 녹는다는 것은 자신의 본래 모습을 포기하는 것이며, 자신의 형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녹지 않은 소금은 그냥 까칠하고 불편한 고체 덩어리일 뿐이다

‘나환자의 사도’로 알려진 성 다미안은(1840-1898) 장티푸스에 걸린 형을 대신하여 1863년 하와이 선교를 자원했다.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한 그는 용암으로 덮인 섬을 쉼 없이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활발히 증거 하였다. 이후 몰로카이의 섬에 수용된 나환자들의 참상을 전해 듣고서는 33살의 나이에 그곳으로 건너갔다.
그곳에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비참한 환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엔 고름 구멍이 있고, 코가 있을 자리엔 그저 빠끔히 뚫린 두 구멍만 있을 뿐, 손은 끝이 부러진 몽둥이와 같았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는 성전의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이들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치겠다고 굳게 맹세하였다.
손수 관을 짜고 교회와 집을 지었으며, 길을 닦고 돼지를 길렀다. 환자들의 고름을 짜주고 환부를 씻어 주며, 붕대를 새로 갈아주며 연고를 발라 주었다. 어느 순간부터 환자들은 그를 아버지처럼 믿고 따랐으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던 그들은 처음에 매우 냉랭했다. “응? 하나님의 사랑이 무슨 말이냐 하나님께 사랑이 있다면 우리들과 같이 병에 걸려 시달리며 고통당하고 있는 것을 버려둘 리 없지 않은가? ! 감사하라고? 그것은 당신 같은 건강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잠꼬대 같은 소리란 말이야. 네가 우리의 고통을 아느냐?
환자들의 고통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하던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아버지, 저로 하여금 문둥병자가 되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그들의 영혼을 깨우치게 하소서.
그러던 어느 날 뜨거운 물을 발등에 쏟았을 때 감각이 없는 것을 느끼고는 주님께 큰 감사를 드렸다. 설교를 할 때 “나의 형제 여러분”이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곤 했는데 그날은 달랐다. “우리 나병환자들은”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 말은 그 역시도 나병환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 자신도 육신이 썩어 들어가는 끔찍한 고통에 시달렸지만, 얼굴이 일그러지고 자신의 본연의 형체를 잃어갈수록 기쁨은 더 커갔다. “이마는 부풀어 오르고, 눈썹은 빠지고 코는 뭉그러졌으며, 귀는 솥뚜껑 같이 되었고, 목소리는 그렁그렁 쉬었고, 살점은 부슬부슬 육체에서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한번은 그에게 어떤 성도가 이제는 좀 쉬라고 하자 “쉰다고요? 쉬고만 있을 때가 아닙니다. 죽기 전에 어서 많은 일을 해야지요.”라고 말했다. 4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나환자들을 위한 헌신의 손길을 늦추지 않았던 그는 스스로 “가장 행복한 선교사”라고 고백을 하였다. 자신의 몸은 비록 다 녹아져 내려도 한 줌의 소금이 되기를 원했던 그의 큰 희생은 저주받은 몰로카이 섬을 은총의 땅으로 변화시켰다.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소금처럼 녹아져야 한다. 뻣뻣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고 고집을 피우고, 나를 인정해 달라고 자존심을 내세우며 원망 불평한다면 소금으로 살아갈 수가 없다. 소금은 녹아질 때 새롭게 태어난다. 달걀흰자와 식용유에 소금을 뿌려 계속 저으면 마요네즈가 된다. 소금이 메주콩과 함께 녹으면 된장이 된다. 뻣뻣한 배추도 소금이 뿌려져 녹아지면 숨이 죽고 맛깔스러운 김장으로 다시 탈바꿈하게 된다.
소금과 같은 사람은 자신의 본연의 모습이 사라졌다고 불평하거나 주인공으로 주목받기를 원치 않는다. 칭찬에 목말라하지 않으며, 소리 없이 녹아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늘 순백의 빛을 발하는 소금처럼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깨끗함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소금처럼 녹아질 때 어느 곳에든 어떤 환경에서든 신앙의 짠 맛을 낼 수 있다.

이 세상에 진정한 소금의 삶을 사셨던 주님. 인간의 영혼의 부패를 치유하시기 위해 자신의 온 몸을 다 녹여 산 제물이 되셨던 우리 주님. 선하신 주님의 큰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수 있게 되었다. 주님의 녹아지심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악취 나고 썩어문드러진 몸으로 영원히 지옥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음을 생각할 때에 무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도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온 세상이 죄악으로 부패하고 썩어갈지라도 내 삶의 자리에서 묵묵히 한 줌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   
 

우리 주님처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숨은 희생을 하셨던 여러 믿음의 사람들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며 소금이 되길 소망해 본다. 그래서 내 생애 마지막에도 “가장 행복한 소금으로 녹아졌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