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로 진실로

예수님의 설교는 다양한 기법들이 활용 되었다. 대표적인 기법은 비유이다. 그리고 반복법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에서도 두 가지 기법이 잘 드러나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서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계시하셨다. 바로 ‘진실로’라는 단어에 그 의미가 담겨있다. 아멘, 아멘의 뜻으로 그 말이 옳다는 의미로 요한복음에서만 25번 반복 사용된다.

설교 중에 성도들에게 아멘에 대하여 설교한 적은 많지만, 정작 나는 얼마나 하나님 말씀에 아멘을 하는가 반성해 본다. 더욱이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베푸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많이 아멘을 하셨구나 생각하면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벅참이 가슴속에 차오른다.

예수님께서 즐겨 사용하셨던 아멘의 뜻은 본래 진실을 뜻하는 히브리어 아멘으로부터 유래되었지만 감탄사로서 사용 될 때, ‘그렇게 되옵소서.’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도 유대인임을 감안할 때 히브리어 아멘이 가지고 있는 뜻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제자들 앞에 이야기하시던 예수님은 그 어떤 말보다 먼저 ‘아버지의 뜻대로 되어지이다.’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는 아멘을 두 번이나 반복하시며 그 일이 자신의 목적이나 뜻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임을, 그리고 스스로 그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는 자세로 임하고 계심을 잘 알 수 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요12:27절),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12:28)라고 말씀하시는 대목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십자가의 형벌까지도 순종하신 삶을 사신 것이다.

그렇게 되어지기를 원하는 것들이 우리 삶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들은 아버지의 영광이 아닌 내 생각대로 되어 지길 원하는 일들이다. 조금 나아가서 내 생각대로 되어 지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면 더 좋고, 라는 맘이 숨겨져 있을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일은 아버지의 뜻대로, 아버지의 영광이 되어야 하고 그것이 순서이다. 그리고 그 일이 이루어지길 진실로 원한다면 예수님처럼 죽는 일이 기다리고 있음도 알아야 한다.   

 
 
죽음의 완성  
하나님의 인류구원 계획에 순종하신 예수님께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실제적 죽음이다. 순종이 죽음이라니 참으로 아이러니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담담히 자신이 겪어야만 하는 일을 말씀하신다. ‘한 알의 밀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여기서 한 알의 밀이 가리키는 주체는 예수님 자신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예수님의 죽음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완성’이다. 모든 일의 결과요 완성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육체적인 죽음과 하나님과의 관계 상실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 예수님의 죽음은, 그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 물과 피를 다 쏟아내야만 하는 실제적 죽음이다. 그것은 비유도 아니고, 특별한 은총이나 신비로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그 시간만 때우는 죽음도 아니다. 모든 것이 생생하고 처절한 피 흘리는 제물과 같은 죽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모형적으로 일 년에 한번 7월 10일에 행했던 대속죄일 제사의 제물 중 하나인 여호와를 위한 제물의 역할로서 예수님은 피 흘려 주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완전한 속죄일 제사를 단번에 드리셔야만 했던 예수님은 아사셀을 위한 제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광야무인지경에 버림받으셔야만 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완전한 상실을 경험하셔야만 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죽음보다 더 완전하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야만 완성되는 속죄 은총의 신비. 그것은 자칭 메시아라 주장하는 그 어떤 피조물도 범접할 수 없는 지고지순의 영역에 도달해 있다. 그 처절한 죽음의 영역에 이르러서야 하나님의 일이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이루어지길 기대하고 말하는 일, 소원하는 어떤 환경들과 결과에 예수님의 죽음을 대비해 본다면 감히 우리가 바라는 그 일이 이루어지길 원할 수 있을까. 죽음을 통해 완성하는 일의 의미를 어찌 함부로 꺼낼 수조차 있을까.   

 
 
행복을 찾아가는 삶
예수님의 삶은 순종의 삶이고 죽음의 삶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죽음을 곳곳에서 영광스럽게 여기셨다. 왜냐하면 그 죽음의 끝에는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었고 무엇보다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대로 한 알의 밀인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교회가 잉태되어 탄생했고 오늘날까지 수많은 생명의 열매들로 가득 차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수선한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보고 우리 가정과 교회, 내 자신을 보며 영광의 열매들로 가득차 있는가 심각하게 진단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곳곳에서 교회의 삶에 대해 진단하기 시작했다. 정작 예수님의 십자가의 삶이 없는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세상이 점점 어두워져 간다. 삶이 없으니 반대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삶이 없는 죽음은 결코 영광의 부활로 살아날 수 없다. 그렇다면 죽은 삶으로 어찌 하나님을 예배하고 세상의 빛이 되려 하는가.
우리는 예수님을 부르고 그분을 찬양하며 그 영광을 예배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열매들은 점차 시들어가고 이윽고 사라져가는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누가 보아도 명백한 위기요, 대책이 필요한 시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삶과 죽음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코로나니, 수해니, 정치적 이해니 모두 두 번째에 불과하다. 그것들을 사소히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해결 된다고 해서 교회가 다시 거룩한 열매로 꽃피우리라 보여 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서 다시 교회의 본질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이 땅에 집중하게 되었을까. 왜 예수님의 재림보다 결국은 사라질 이 물질계에 교회를 높이 짓고 헌금을 많이 걷는 것에 열을 올리게 되었을까? 왜 나와 속한 단체의 옳음 때문에 상처 입는 수많은 영혼들을 가볍게 여기는가. 정작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예수님의 죽음이 얼마나 처절한지 모르고 영광에만 취해 있는가.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사도바울은 말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오늘날 한국 교회는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기보다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독교는 세상을 정화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을 오염시키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 질문한다. “예수가 그렇게 가르치더냐?” 우리는 무엇이라 대답해야 하는가.

우리가 손에서 놔야만 얻을 수 있는 영광이 있다. 오늘날 교회는 무엇을 손에서 내려놔야만 할까? 나는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까. 깊이 고민해야만 할 일이다. 지성과 신앙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던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인생의 행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장 큰 행복이란 유한한 생명체가 무한한 생명의 근원에 돌아가 절대자의 신성에 접근할 때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돌아갈 영원한 행복, 그 이름은 예수그리스도이다. 자고나면 또 나타나는 거친 풍랑들, 괴로움의 파도, 지긋지긋한 애정과 욕망을 다 뛰어 넘고 가야 할 곳이다. 상하고 지친 모습 그대로, 수고한 땀방울 가득한 얼굴, 피곤한 무릎과 넘어져서 피 흘린 무릎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도달할 곳이다. 그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오늘 다시 우뚝 일어서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