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응을 배우며

옥상 정원을 만들고 어쭙잖은 텃밭 재배를 해온지 5년이 지나간다. 과실수도 채소도 화훼도 조금씩 가꿔보며 하나님 창조의 신비를 엿본다. 어떻게 저리 다른 모양으로 저토록 잘 어울릴 수가 있는지. 긴 겨울을 견디고 틔운 새순들을 보고, 땅속에서 빼꼼 머리를 쳐든 새싹을 보노라면 탄성이 절로 난다. 조그마한 열매라도 맺히면 그것은 마치 자식처럼 느껴지고 쓰다듬고 싶은 다정한 마음이 일어난다.

하지만 더 감동적인 것은 그들의 순응이다. 잘려도 뽑혀도 말이 없다. 잠시 시간이 지난 후, 또 다른 가지나 순을 가만히 내놓을 뿐이다. 세찬 바람이 불어 꺾이고 찢어져도 그저 묵묵히 봉합하고 그 상한 것을 비난하거나 조롱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잎으로 가리고 그의 회복을 기다린다.

불현듯 전체를 보고 싶어 옥탑으로 올라가 보면, 이는 곧 경탄의 시간이 된다. 작지만 백 수십 여종의 식물들은 완벽한 하나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 한 조화란 바로 순응이다. 하나님을 향한 순응.

순응이 어려운 이는 바로 나다. 자아가 강해서다. 비집고 올라오는 판단과 정죄는 종종 분노로 표출된다. 내가 싫은 시간이다. 그럴 때 저들의 순응은 날 부끄럽게 하고 신선한 공기를 만드는 그들의 녹색 잎은 다시금 정화의 소망을 준다.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은 다 이와 같다. 유독 사람만이 반항한다. 자아가 강할수록 더 반항하며 권위에 더 도전한다. 모든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부러 잊은 까닭이다.

정원은 식물마다 독립적이나 전체는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순응하는 모든 것을 계획하신 하나님의 질서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아가 강한 사람들은 일치와 조화를 아무리 외쳐도 철저히 독립적이다. 화합이나 순종보다는 개인의 생존이 더 중요하다. 명분이 겸손을 물리치고 스스로 붙잡는 사명감이 순종을 훼방한다. 계시를 이루려고 이스마엘을 낳거나 예레미야 시대처럼 책망의 계시는 잘못이라며, 자신을 인정해줄 계시를 찾아 나선다.

어거스틴 성자도 신앙에 있어 가장 귀한 덕목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 하셨다. 주님께서도 누구든지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 낮아지고자 하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 하셨다.

예수님의 삶은 탄생부터 죽음까지, 그리고 부활해서까지도 모두가 다 겸손이셨다. 마구간에서 죄인들 속으로, 죄인들에게서 골고다까지, 차디찬 무덤에서 다시 갈릴리까지 그 모든 여정은 몽땅 다 겸손이셨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철저히 순응하신 주님은 오늘도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거하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하신다.

교만으로 답답해질 때, 모든 불편도 아픔에도 순응하는 식물을 보자. 단단한 자아로 인해 자신에 대해 분노가 일 때, 순응하는 식물들을 만드시고 그 식물 중 하나에 못 박히신 주님을 보며,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것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셨던 그분의 뒤를 좇으며 겸손히 나아가자.

박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