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때처럼, 여름이 가는 요란한 소리는 매미로부터 온다. 얼마 남지 않은 여름이 자신의 마지막 생애가 됨을 아는 듯 온몸을 쥐어짜는 울음은 운명을 예감하는 진혼곡처럼 들리기도, 사랑의 열창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수년을 땅속 굼벵이로 지내다 드디어 나온, 세상의 향유할 시간은 겨우 며칠밖에 없다니. 이리저리 삶의 시간을 허송세월로 낭비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오직 짝을 찾아 전 생애를 몰입하는 그것은, 신부를 찾아 이 땅에 오시고, 신부를 신방에 들이려고 다시 오시는 신랑 예수님과 같다. 주님의 생애는 실로 애절한 구애의 삶이었다.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엇에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거하라”(미6:3).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다”(눅3:34).
호소하고 간청하며 주님은 집 떠난 자기 백성을 찾고 또 찾으시고, 함께 영복을 누릴 신부를 찾으셨다. 하지만 슬픔은 사람들이 별 관심이 없다는 데 있다. 자기의 편안한 현실과 안락한 삶을 훼방하지 말라고 거부하는 것이다. 신앙도 조금, 믿음도 조금, 헌신도 사랑도, 여기서도 저기서도 조금씩만 한다. 그리곤 남은 대부분 시간은 세상 즐거움과 명예를 구하며 그 허무한 일에 쏟는 것이다.
매미는 오직 한 목적만으로 삶을 영위하며 죽는 날까지 헌신한다. 예수님처럼 신부를 찾는 일이다. 밤늦도록 식을 줄 모르는 그 처연한 소리는, 연인의 창문이 열리기를 바라며 부르는 우리 주님의 세레나데 같다.
참 그동안 주님을 사랑하는 일보다는 주님에 관한 일에 분주했다. 필요한 일이었지만 주님을 사랑함이 감지되지 않는 자기 의가 더 많았다. 적어도, 저렇게 요란하게 부르는 사랑의 음성에 대꾸라도 해야 했지 않았는가.
작은 매미라 할지라도 그 울음소리는 1m에서 터지는 수류탄의 폭발음과 같다니… 이런 미물을 창조하시며 주님은 주님의 사랑의 연가를 들으라 하심이셨을까. 그렇담 우리는 얼마나 주님을 목놓아 부르며 울어야 하는가. “내 주여 내 주여 날 들으소서. 내 주여 내 주여 날 들으소서…”
소화 테레사는 마지막 병고 속에서 “살기 시작하기 위하여 나는 죽고 싶어요. 예수님과 결합하기 위해 나는 죽고 싶어요. 제가 주님 계신 곳에 가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지만 병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병은 너무 느린 안내자입니다. 저는 사랑만을 기대하고 있어요.” 고백했다.
매미 뒤로는 여치가 따르며 경쟁하듯 울어댄다. 가는 여름이 너무 짧아서이다. 우리네 삶도 너무 짧다. 젊음이 가고 기력도 간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무엇을 위해 울어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소리쳐 불러야 하는가. 나의 세레나데가 있는가. 날 위해 사랑으로 죽으셨던 내 주님께 불러드릴 사랑의 연가가 있는가.
뜨거웠던 여름이 끝나간다. 시원한 가을이 저 동구 밖에 와있다. 짧은 삶이 끝나간다. 신부를 데리러 오실 주님이 저기 낮은 구름 위에 서 계신다.
박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