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이끄는 십자가의 삶

12일간 익산 글라라 수도원과 김제, 남원 동광원을 다녀왔다. 한 곳 한 곳을 방문하며 내 안에 은혜의 단비가 잔잔히 내려졌다.

첫날은 글라라 수도원에서 50년간 수도생활을 하신 노 수녀님에게 권면을 들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요 이끄심입니다. 단 한 가지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고 처음 지닌 마음으로 모든 일에 성실하게 임하십시오. 다른 모든 것은 그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저녁에는 김제에서 KBS 스페셜 「앎, 교회오빠」라는 영상을 보았다. 4기 암부부가 암을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과정을 그려냈다. 결혼한 지 3년 만에 예쁜 딸을 출산하고 산후조리원을 나오는 날, 37살 젊은 남편이 대장암 4기 진단을 받았다. 청천벽력 속에 불행이 또 이어졌다. 아들의 4기암 진단에 충격을 받은 시어머니가 스스로 삶을 마감한 것이다. 든든하게 신앙으로 이겨내던 남편이 어머니의 비보 앞에 한없이 무너져 내렸다. 시어머님이 떠난 지 5개월 후, 아내마저 혈액암 4기 진단을 받았다. 욥기의 주인공 욥의 운명이 남편 이관희를 덮친 날이었다.

“주님, 이러다 우리 가족 모두 다 죽게 생겼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부부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투병하며 딸을 키워야 했다. 그러나 쓰나미처럼 덮쳐오는 고통 앞에 원망만 쏟아내지 않았다. 오히려 고통을 통해 주님과 더 가까워져갔다. 부인에게 남편은 미소 지으며 “쫄지 마!”라는 격려를 하였다.

“수술과 항암 치료를 통해서 내 몸속에 있는 안 좋은 것들을 없애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은 다하고 있지만, 동시에 내 마음속에 지금까지 자리잡고 있었던, 더러운 것들을 어떻게 하면 없애고 줄여갈 수 있을까 돌아보고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통해 내 안의 힘을 다 빼고 주님이 이끄는 삶으로 인도해 가고 계세요.

고난의 터널은 길었다. 그 어려운 항암 치료를 수차례 받으며 완치 판결을 받았는데, 14개월 만에 남편의 대장암이 다시 재발하였다. 열세 시간의 수술을 거쳐 뱃속의 모든 복창만과 대장을 절개해야만 했다. 부인이 중환자실에서 온 몸에 관을 꽂고 숨을 헐떡이는 남편에게 성경책을 읽어줄까 하자, 고개를 저으며 천정을 가리켰다. 시편 34절 말씀이 붙어 있었다. “내가 주님을 바라보며 소리 높여 찾을 때에, 주께서는 그 거룩한 산에서 응답하여 주십니다.

생사의 갈림 길 앞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그들의 모습에 나의 고통과 번민이 너무나 초라하고 작게 느껴졌다. 나의 눈과 마음에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 내렸다.

“정말 무난하게 암에 걸렸다고 생각해 봐! 그럼 뭐 의사 잘 만나 수술 잘 해서 항암치료 잘 받아서 고쳤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이잖아. 너 내가 살렸다는 걸 확실히 증거하시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믿음과 신뢰를 잃지 말고 나아가야 할 것 같아.

중환자실에서 “왜 이렇게 힘든 길만 가게 하시냐?”고 할 때 마음이 너무 아팠다고 부인이 말하자, 그는 말했다. “육신의 아픔이 있기 때문에 더 깨어 있을 수 있었고, 건강할 때는 부끄러운 삶을 살았지만, 인생에서 가장 육체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하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고통 가운데서도 평안을 누리면서 가는 남편을 보면 부인은 놀랍다고 했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지금 이 질병이 고통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내가 이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변해 가는지가 굉장히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중요한 것은 감사함으로 이 상황을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하나님께 서운한 마음이 들 때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나만의 손익계산서를 쓰거든요. 여태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누렸던 은혜는 플러스로, 그 다음 내가 느끼는 절망을 마이너스로 해보면 그 계산 결과는 항상 플러스예요. 지금 우리가 힘들어하고 원망하는 이유는 지금 내가 당하는 이 고통의 현실에만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내 삶의 전체를 봤을 때 내가 받은 은혜들을 다 계산해보면 감히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겠구나 하는 것이 제 결론이에요.

그는 참 유익과 축복이 무엇인지 ‘암’이라는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며 깨달은 ‘앎’을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부터 완치해야만 기적이라 하고 그런 기적들만 바라고 있지만, 그는 질병을 만나서 오늘 하루도 삶이 이어지고 있다는 게 큰 기적이요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루라도 왜 더 살아야 되냐고 물어보면, 하루라는 시간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더 온전해질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기 때문이고 그게 삶의 이유라고 하였다.

둘째 날에는 동광원을 방문하여 김금남 원장님과 영적 담화를 하였다. 올해 아흔이신데,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3시간 동안 꼿꼿하게 앉으셔서 어린 영적 딸들에게 하나라도 더 나누어 주시기 위해 지나온 삶들을 풀어 놓으셨다.

젊은 시절, 이현필 선생님을 따라 하루 종일 맨발로 눈길을 걸으셨다고 한다. 처음에는 못 갈 것 같았는데, 3일 동안 그렇게 가다가 전도도 하고 계속 걷다보니 육체 고통 속에 숨은 기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셨다.

300리 길을 걸어 깊은 산속 움막에서 지내는데, 지네가 출몰하고 밤낮으로 물어뜯는 벼룩으로 인해 괴로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포기하고 내려가려는데, “이 길은 내가 이끄는 십자가의 길이다. 그것도 모르고 출발했느냐?”라는 내면의 음성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날 밤 인정사정없이 물어뜯는 벼룩과 씨름을 하면서, 죄 많은 자신이 벼룩처럼 주님을 괴롭힌 존재라는 사실이 깨달아졌다. 지네와 벼룩이나 자신도 똑같은 불쌍한 존재로 인식되자 그곳이 살만해졌다.

먹을 것, 입을 것, 거처할 곳 없이 이곳저곳을 옮겨 다녀도, 빈털터리가 되어 무엇 하나 의지할 곳 없는 신세가 되어도, 똥 구루마를 끌고 다녀도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요,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이라고 생각하니 문제가 없었다고 하셨다. 지금의 남원, 동광원에 터전을 마련하기까지도 그리 쉽지 않으셨다. 나무들이 빽빽이 우거져 산짐승들이 출몰하고 돌로 가득한 깊은 산을 개간하려 하자 처음에는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강한 이끄심에 “주님의 뜻이라면 가다가 죽더라도 가겠습니다.”라며 순종을 하셨다.

바깥 뜰 의자에 앉으셔서 배웅하시는 원장님의 마지막 말씀이 그 어느 때보다도 거룩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주님의 이끄심 따라 순결하게 가는 이 길이 행복의 길이요, 죽는 그날까지 예수님 모시고 가는 것이 성공의 길입니다. 지금 돌아보니 내면의 싸움을 할 때가 행복했던 것 같아요. 싸우긴 싸우되 목표를 잃지 마세요.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이 행복의 길이다. 비록 그 길이 험난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길이요, 고통과 아픔의 길이라도 말이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은 내가 죽고 예수님만 사는 삶이다. 내 안의 힘을 다 빼고 주님의 힘만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어떤 환경과 조건일지라도 목표를 잃지 않고 하나님의 이끄심에 순종하며 나아갈 때,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더 깊이 목격하게 될 것이다.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