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선언문

한창 꿈이 많던 고등학교 시절, 청소년비전캠프에 참석했었다. 그 캠프는 청소년들이 하나님 안에서 비전을 갖고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모임이었다. 목사님은 학생들에게 종이 하나씩 나눠주신 뒤 각자의 사명선언문을 적어서 발표하라고 하셨다. 모두들 기다렸다는 듯 각자의 원대한 꿈을 적어나갔다. 자선사업가, 대학교수, 장관, 대통령까지 친구들의 비전만 들어도 기가 죽었다. 고민 끝에 소박한 꿈 하나를 적어냈지만 무언가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의 비전을 찾으면 가슴이 뛰어야 한다는데 가슴이 뛰지 않았다.

그때 성경구절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8:20). 예수님의 사명선언문이었다. 놀라다 못해 충격적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니? 게다가 자기 목숨을 아예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다니? 예수님의 사명선언문은 친구들이 써낸 것과는 정반대였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하지만 겸손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엔 너무나 초라하고 비참해보였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희생과 헌신이기에, 그냥 그렇게 그 밤을 흘려보냈다.

언제부터일까? 어느 모임에 참석해도 마음에 평화를 찾을 수가 없다. 눈을 뜨면 주변사람들의 허물이 보이고, 눈을 감으면 헛된 욕망이 떠올라 마음이 괴롭다. 회개를 해보아도 마음이 시원하지 않고, 마음에 얹힌 돌덩이는 점점 무거워진다.

한 모임에 참석하여 특강을 듣는데 강사님은 마태복음 2820절을 본문으로 택하셨다. 함께 본문을 읽는데 예수님께서 내게 말을 거신다.

이것은 나만의 것이 아닌 너의 사명선언문이 되어야 한다. 너는 지금까지 잘못 살았다.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너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다. 그런데 너는 왜 섬김 받기만을 바라고, 너의 목숨을 너 자신을 위해 사용하려고 하느냐?”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왜 그동안 내 마음에 평화가 없었는지, 왜 눈을 들면 남의 허물만 보였는지. 섬김의 삶보다 어디 가면 좀더 섬김 받고 대접받고 칭찬받을 수 있을까만 골몰하며 살아온 것이다.

비전캠프에 참석해 나의 사명선언문을 적으며 고민하던 그날 밤, 주님은 이미 나를 부르셨다. 바로 주님의 뒤를 잇는 희생 제물의 사명으로 말이다. 세상을 위하여 죽는 한 알의 밀알로 나를 부르셨는데, 나는 그 부르심을 알아듣지 못했다.

일본에 세실리아 하나꼬라는 처녀가 있었다.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졸업반에 아버지는 화물선 수백 척이 있는 유선 주식회사의 사장이었다. 외모 또한 출중하여 모든 처녀들이 부러워할 만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그녀는 학교를 마치고 돌아가다가 사제 한 분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전도 하느라고 동경 주변의 농촌 지대와 빈민굴을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마침 그날은 자그마한 초가에 아주 늙어 꼬부라진 할아버지와 젊은 부인과 기형아요 백치 아다다 같은 어린 딸이 사는 가정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그 젊은 부인은 그 할아버지의 친 딸임에도 불구하고 친아버지와 부부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개돼지와 같은 취급을 당하고, 아무도 그 가정과 이웃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사제는 차를 타고 가며 그녀에게 방금 방문했던 그 가정의 비화를 들려주면서 모든 인간은 그들의 생활 이면이 화려하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렇기에 그런 인간들을 구하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실 수밖에 없었고, 십자가에서 처참하고 처절하게 죽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 말을 이었다. “정죄의 화살을 날리기 이전에 이웃들의 고통을 돌보면서 누군가는 그들을 대신하여 예수님처럼 희생의 제물로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노를 풀어 드려야 할 텐데 그렇지를 못해 안타까울 뿐입니다. 우리의 빛된 행실을 통하여 그들이 스스로 죄에서 돌이키도록 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이 만남이 계기가 되어 그녀는 사제와 함께 전도를 여러 번 다녔다. 그녀는 산다는 것이 무엇이고, 인생의 맨 밑에 깔려 있는 어두운 면, 비참한 것, 슬픈 것, 죽지 못해 살아가는 고달픈 인간상들을 보고 하루는 이렇게 고백했다.

저는 사제님께서 자동차 안에서 하시던 그 말 때문에 비로소 인간 항로의 고민을 알게 됐어요. 고요하고 평온하던 나의 마음에는 고민의 파문이 번지고 번민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어요. 그 말은 영원히 내 뇌리에서 지워질 수 없는, 나의 운명을 결정짓는 말이기도 한 것 같아요. 주님은 이 세상에 죄인들 때문에 인간의 허물을 쓰고 내려올 수밖에 없으셨고, 십자가에서 처참하고 처절하게 죽을 수밖에 없다고 했지요. 죽으셨던 주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안 계신데, 세상에는 여전히 인간들이 죄를 짓고 범하고 있으니 그 누군가 주님을 대신해서 죄인들을 위해 죽어야 하고 생명을 걸고 회개를 해야 할 텐데 그럴 사람이 없다고 한탄했지요. ‘내가 바로 그 사람이 될까? 과연 될 수 있을까?’ 이렇게 번민하다가 저의 마음은 지쳤어요. 무척 염치없고 건방진 생각이지요?”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사제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주님을 대신해 죄인들을 위해 죽을 사람이 바로 당신이에요. 생명을 걸고 죄인들을 대신해서 속죄할 사람도 바로 당신이에요. 틀림없어요.”

그날로 북해도 여자 트라피스트 수녀원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그녀는 이후 평생을 그곳에서 보낸다. 이곳은 오직 관상과 노동을 통해 극기의 생활을 하는 수도회다. 일생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단지 하나님께 기도할 때만 입을 열뿐이다. 일생 금육을 지키며, 채소와 감자와 빵과 냉수로만 배를 채우고, 북해도와 같이 추운 곳에서 양말도 신지 않고, 신발은 자기들이 깎아 만든 나무 샌들을 신는다. 기도가 끝나면 수백만 평의 광활한 목장에 나가 수천 마리의 소를 기른다. 이 농장의 수입원을 통해 수도원의 생활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사용하고, 남은 것은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일반 사회인들도 그 수녀원을 천사원이라고 한다. 그녀는 이 수도원에서 평생을 하루하루 변함없이 주님의 고난의 흔적을 되새기며, 자신의 죄뿐만 아니라 이웃들을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희생하며 속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주님을 대신해 죄인들을 위해 죽을 사람이 바로 나다. “내가 마지막 때 너의 가정을 위한, 교회를 위한, 공동체를 위한, 나라를 위한 대속물로 너를 택하였다.”

. 주님, 제가 여기 있나이다.” 다시 화답하며 기쁘게 달려가보자.

박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