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양 예수님을 따라 가는 길

최근에『나는 어린양을 따르리라』는 찬양을 들으면서 입으로 많이 흥얼거리며 다녔다. “나는 들었네. 옛 성도들 폭군 앞에 끌려간 그 이야기. 주의 이름을 부인하면 살려주리라 약속했지만, 모든 성도 죽음 택했네. 오~ 예수님 부인치 않고, 지금도 그들 목소리 천사 노래처럼 나 들을 수 있네. 나는 어린양을 따르리. 온 힘 다해 온 맘 다해. 그의 명령에 순종하리. 나는 어린양을 따르리.”

하지만 난 찬양가사와는 너무나 상반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조그마한 핀잔도 듣기 싫어서 어느 땐 마음에서 그들을 폭군으로 내몰아버리기도 한다. 멀찍이 서서 사람들 눈치만 살피면서 적당히 주님을 따르는 시늉만 할 때도 있다.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면 고달픈 인생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거짓된 약속이 더 좋아서 편안하고 안전한 길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다. 주님의 떡을 떼는 만찬의 자리까지는 따르되 누군가가 내 목덜미라도 잡아서 원치 않는 일, 귀찮은 일, 번거로운 일을 맡길까봐 그 자리를 얼른 도망치듯 빠져 나올 때가 많다.

십자가의 고난을 예고하시며 고별설교를 하시는 주님께 “어디로 가시나이까?” 묻던 베드로에게,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하셨던 예수님. 이에 “주님을 위하여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내 목숨까지도 기꺼이 버리겠습니다.”고 호언장담하던 베드로였다. 하지만 작은 소녀의 비방 앞에 순식간에 스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그 순간 애처롭고 측은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눈빛과 마주쳤을 때 베드로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어쩌면 베드로보다도 더 멀찍이 서서 주님을 따르는 시늉만 하다가 수없이 주님을 외면하며 배반하고 있는 것이 지금 나의 모습이 아닐까? 물욕, 수면욕, 명예욕, 성욕, 식욕과 친구간의 애정, 혈육간의 애정, 사물에 대한 애정, 남녀간의 애정에 방황하며 갈지(之)자를 이리저리 그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 앞에서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주님을 따르십시오.”라면서 천사의 아름다운 소리마냥 목청을 높이고 있다. 절름발이며 눈멀고 병든 양인 줄도 모른 채,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 밝은 빛 좁은 길을 나름대로 따라가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아픔과 고난과 희생 없이는 결코 따를 수 없음을 잊고 살아가고 있다. 애써 모른 척하고 있다. 힘들고 고달프고 어려운 환경이 싫어서 되도록 멀리 도망치려 하고 있다. 그것이 위험하고 멸망하는 길인 것을 알면서도 강력한 정욕의 세력을 끊어내지 못하고 있다. 정말 몹쓸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광야무인지경(지옥)으로 마땅히 버림받아야 할 인간에게 주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하심이 있기에 아직도 이 추악하고 간사한 죄인이 이렇게 서 있을 수 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으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온 인류의 세상 죄를 지시고 온갖 조롱과 멸시와 수치를 당하시며, 그 험난한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던 주님.

지난 주 목요일 날 다녀왔던 해미 순교성지의 감동이 다시 밀려온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랐던 그분들의 거룩한 행렬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군졸들은 그 옛날 예수님을 예루살렘의 영문 밖으로 내쫓았던 폭군처럼 밧줄로 꽁꽁 묶어서 기독교인들을 서문 밖으로 몰아냈다. 문턱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면 살려주겠다고 위협을 하면서. 그러나 그들은 기꺼이 죽음을 선택했다. 하나님과 함께한 삶이었기에 이들은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기꺼이 목숨을 내놓았다. 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외부인들은 “예수, 마리아” 기도 소리를 ‘여수머리’로 알아들었고, 지금은 그곳이 ‘여숫골’로 불리고 있다.

생매장형이 시행되면서 여름철 죄인의 수효가 적을 경우에는 사령들이 번거로움을 덜기 위한 방법으로 개울 한가운데에 있던 둠벙에 죄인들을 꽁꽁 묶어 물속에 빠뜨려 죽이기도 하였다. 해미 지역의 외인들은 죄수들을 빠뜨려 죽인 둠벙이라 하여 ‘죄인 둠벙’으로 부르기도 했으나, 현재는 이름조차도 변해 ‘진둠벙’이라 불리고 있다. 그들에게 진리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세상을 멀리하고 주님께만 오로지 풍덩 빠져 있던 그들은 말이 아닌 죽음으로 그것을 증명하였다.

죄수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메어치는 자리개질로 죽이고, 여러 명을 눕혀 놓고 돌기둥을 떨어트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하였다. 혹시라도 꿈틀거리는 몸뚱이가 있으면 횃불로 눈알을 지져대기도 하였다. 아직도 비가 오면 핏자국이 군데군데 자리개 돌 위에 드러난다고 한다. 그 앞에 놓여 있는 “무릎 꿇고 기도하십시오.”라는 팻말이 마음을 엄숙하게 하면서 저절로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게 하였다.

“주님, 저도 이 길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또한 “그렇구 말구,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님께 바치는 거야.”라고 고백하면서 죽어간 해미 첫 순교자 마르티노의 고백이 눈시울을 붉히게 하였다.

묵묵히 죽음의 길을 선택하며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끝까지 따랐던 그들의 신앙의 절개와 용기가 정말 부럽다.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갔던 믿음의 선진들. 나도 그분들의 행렬 뒤에 서고 싶다. 비록 지금은 너무나도 부족하지만 “지금은 내가 가는 곳을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베드로에게 하셨던 주님의 말씀이 내게 큰 힘과 위로가 된다.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조용히 마음으로 “나는 어린양을 따르리라.”는 찬양을 드리며 고백을 드려본다.

우리 위해 십자가 지신 그분을 위해 살아야 하리. 나를 대신해 고통 당해 수치 지신 그분을 위해 살아야 하리. 마지막 나팔 울릴 때까지 참으며 담대히 진리를 선포하여야 하리. 주님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 하리. 온 힘 다해 온 맘 다해. 주님의 명령에 묵묵히 순종하며 어떤 환경과 조건에서든지 어린양을 따라야 하리. 원치 않는 수많은 띠를 내게 띠울지라도 묵묵히 주님의 길을 따라야 하리. 썩어 없어질 한낱 구더기와 같은 흙집에 연연하지 말고 순간순간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죽음의 길을 선택해야 하리.

“그렇구 말구,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하나님께 바치는 거야.”라는 고백을 드리며, 순교의 피를 흘리는 그 순간까지. 여호와의 속죄 제물로 모든 피를 흘리시며, 아사셀의 속죄 제물로 산채로 버림받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주님. 그 사랑에 감격하여 사랑하올 주님만을 외치며 죽어갔던 그분들처럼, 나도 그렇게 향기로운 산 제물이 되리라 결단한다.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