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많은 광야 40년

 전라도 임실에서 예배를 드려달라는 연락이 왔다. 그동안 몇 차례 부탁을 했는데도, 시간이 여의치 않아 가지 못했었다. 마침 그날 오후에 짬을 낼 수가 있어 기차를 타고 내려갔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든 시간 임실역에 도착했는데, 하나님께서 언약이라도 해주시는 듯 하늘에 무지개가 떠 있었다.

마중 나오신 권사님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눈 뒤 밤늦게까지 기도회를 하였다. 자정 무렵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개구리 울음소리에 창문을 열어보니 밤하늘에 초롱초롱한 별들이 쏟아져 내릴 듯했다. 저 산 너머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남원 동광원 김금남 원장님과 오세위 장로님, 할머니들이 머릿속에 밤하늘의 별처럼 떠다녔다. 지난달 동광원의 할머니들이 힘겹게 딴 강낭콩 한 박스를 보내주시면서 언제 한 번 안 오냐고 하셨는데 찾아뵙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 든다. 고향 땅의 그리운 분들 얼굴이 하나둘 떠오르며, 40년 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찌든 살림에 꼬물꼬물한 7남매를 기르시다가 아버지는 힘이 부치시면 술을 드시고는 한 맺힌 설움을 어머니에게 쏟아 붓곤 하셨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울면서 서울로 돈 벌이를 가신다고 보따리를 싸가지고 싸리문을 나섰다. 어린 동생들이 어머니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우린 어떻게 살라고 그래요.”라면서 울음을 터트리면 차마 뿌리치지 못하셨다.

초등학교 시절엔 10리도 넘는 거리를 아침저녁으로 뛰어다녔고, 통학하는 길에 배가 고플 때면 버찌나무 위에 올라가 버찌열매나 아카시아 꽃을 따먹고 개울물로 배를 채우곤 하였다. 중학교 때는 먼 거리를 자전거로 통학했는데 험한 산길로 인해 자주 펑크가 나 지각을 많이 하였다. 고등학교는 다른 친구들처럼 큰 도시로 나가려고 입학시험을 치르고 합격하였지만 돈이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집에서 가까운 임실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당시에 거친 학생들은 물론 질서도 엉망이었고 면학 분위기도 조성되지 않았다. 그런 학교가 점점 싫증이 났다. 학비를 가지고 아무도 모르게 집을 나서는데 멀리서 , 하고 남동생이 따라와, 어머니가 알면 혼이 난다고 빨리 집으로 가자고 재촉하였다. 3500원 중 500원을 동생 손에 쥐어주면서 당부를 하였다. “엄마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라. 동생들 잘 돌봐주고 서울 가면 꼭 편지할게.” 막차 버스가 오자 동생에게 500원을 더 얹어주면서 차를 탔다.

임실역에 도착하여 무작정 서울행 완행열차를 탔다. 출입구 난간에 서서 부모님들 생각에 밤새 울면서 영등포역에 도착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돈은 다 떨어지고 배는 고프고 갈 곳도 없고 노숙자처럼 역전, 남의 처마 밑에서 잠을 잤다.

그러던 어느 날 가까스로 먼 친척 되시는 형이 연락이 되어 공장에 취직을 시켜 주었다. 코피를 흘리며 밤새 일을 하고 틈나는 시간에 공부를 하겠다고 책을 폈다. 하지만 함께 숙식하던 사람들이 술을 먹고 싸우고 방을 어지럽히고 소란을 피워 난장판이 되기 일쑤였다.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을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틈틈이 공부를 하면서 돈을 모아 프랑스에 가서 그림공부를 해야겠다는 꿈을 가졌다. 몇 년 동안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 드디어 비자를 신청해 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목에서 붉은 핏덩이가 쏟아져 나왔다. 서울 서대문 적십자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니 폐결핵이었다. 떨리는 다리로 혼자 병원 계단을 내려오며 하늘을 보는데 젊은 날 꿈 한번 펼쳐보지 못하고 이대로 죽는구나.’라고 생각하니 내 인생이 너무도 가련하고 야속했다.

가난에 한이 맺혀 이를 악물고 버둥거렸지만 인생은 결코 내 맘대로 되지 않았다. 미친개처럼 술을 먹고 한강 뚝섬을 걷다 이대로 죽자 하고 시퍼런 한강물을 내려다보는데, 가족들이 떠올라 발길을 힘겹게 돌렸다. ‘누가 내 한을 풀어줄 사람은 없습니까? 누구라도 내 한을 풀어주면 내 목숨 전부를 드리겠습니다.’라며 서울거리를 헤매다가 신림동 4거리에 도착하여 어느 작은 교회 문이 열려 있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교회 강단의 십자가 불이 나를 부르는 듯 해 강단 앞으로 가서 엎드렸다.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고 있는데, 그날 주님이 나를 만나주셨다. 주님은 진정 내 한을 풀어주신 분이었다.

이후 36개월 사선을 넘는 혹독한 시험의 과정을 거쳐 이 죄인을 연단하신 후 폐결핵과 합병증을 깨끗이 낫게 해주셨다. 가난하고 병이 들어 못다 한 공부를 신학교에서 할 수 있도록 하셨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인데, 부족한 내가 감히 신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내가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이미 나를 택하여 부르신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시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들으며 신학교를 다니던 시절은 나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조용히 길을 걸으며 주님을 묵상하고, 학교에서 혼자 남아 늦게까지 기도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구름 위에 떠다닌 것처럼 행복했다. 무엇보다도 귀한 영적 스승님을 만나게 된 것은 나에게 큰 은총이었다. 19살에 강직성 척추염이 발병하신 후 일평생 몸을 가누지도 못하시고, 줄을 타는 곡예사처럼 늘 긴장과 고통가운데 사셨건만 온유와 겸손으로, 사람 같지 않은 이 죄인을 사랑으로 섬겨주셨다. 이론만이 아닌 생생한 삶의 빛으로, 무교병과 맑은 물을 공급해주시면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셨다.

지금은 가난이 참 좋다. 가난은 더 이상 내게 한이 아니다. 불편을 통해 십자가의 고통을 배울 수 있고, 머리 둘 곳도 없으셨던 예수님의 가난을 몸소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난은 세상 부귀영화와 바꿀 수 없는 놀라운 하늘의 축복이 깃들여 있다.

어려운 환경 때문에 못 배운 사람일수록 내게는 더 소중한 분들로 다가온다. 배우지 못한 한을 풀어주고 싶은 마음에 아무리 신학교에서 시험 점수가 낮을지라도 그들을 격려하며 함께 가고 있다. 끝까지 사랑하시며 나를 이끄시고 격려하셨던 주님이 그러하셨기에 뒤처지고 어렵고 힘든 사람을 대할 때에 더욱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된다. 사랑에 빚진 자로서 울 힘조차도 없고 한 맺힌 가슴을 부여잡고 신음하는 영혼들이 지금이라도 나를 부른다면 주저하지 않고 곧장 달려가고자 한다.

내가 살고 있는 금이동 수련원은, 이런 저런 아픔과 한이 맺힌 사람들이 찾아오셨다가 영혼의 치료를 받고 돌아가신다. 안락한 잠자리가 없어도, 풍성한 식탁이 아니어도 예수님을 닮은 가난을 몸소 체험하며 함께 기도하고 노동하고, 서로 순박한 사랑과 겸손을 나누며 천국의 사랑을 배워가고 있다. 돈과 부요함이, 편안함과 안락함이, 높은 권세가 우리의 한을 풀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 가난해도 좋다.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함께하면 슬퍼도 손해가 닥쳐도 좋다.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주님께서 친히 위로해 주시고, 장차 많은 영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함께하면 죽음도 좋다. 부활하신 주님과 영생복락을 누리기 때문이다.

이용도 목사는 고통이 올 때 그것에서 배우는 것이 평안할 때보다 더 많으며 또 참된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가난함은 나의 사랑하는 아내같이 나를 떠나지 않나니 나는 건방진 부보다 착한 가난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높은 데 처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은 늘 겸비하여 낮은 데 처해 있어야 됩니다. 그런고로 비천은 늘 내가 처하여 있을 궁전이 됩니다. ()와 빈()과 비()를 사랑하게 되면 다 되는 때입니다. 고는 나의 선생, 빈은 나의 애처, 비는 나의 궁전 자연은 나의 애인의 집으로 하고 나는 거기서 주님으로 더불어 살렵니다.”라고 했다.

가난이나 질고나 곤두박질치는 환경 등 한 많은 인생처럼 느껴지는 고통의 길이 훗날에는 복받은 길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 거칠고 황량한 40년 광야 길을 걷는다(8:2). 그러나 그 길은 고통도 슬픔도 한 많은 길도 아니다. 40년 미디안 광야를 지나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탈바꿈했던 모세처럼, 40년 모세의 시종으로 살다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후계자로 세워졌던 여호수아처럼, 40년 가시밭길 병상의 생활을 통해 예수님을 온전히 닮아 완덕에 오르셨던 나의 영적 스승처럼, 광야는 천국을 향해 소망의 닻을 올리는 복의 장소다. 가난해도 병들어 골골 거려도 이 길만은 완주하리라, 모든 죄의 사슬을 풀어주실 우리 주님을 기다리면서. 이리저리 가시밭길을 뒹굴어도, 수많은 고통의 화살이 꽂혀 가슴에 한이 맺혀도 모든 눈물과 고통을 닦아주실 주님 때문에 난 행복하다.

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