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말없이 그 잔을 마시리다

나는 다시 아내의 시중을 받게 되었다. 나의 육은 도움을 받는다마는 나의 영은 다시 신고(辛苦)의 잔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될 것이로다. 그것은 저는 육에 속한 사람이요, 나는 영에 속하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저는 지상에서 행복을 바라는 자요, 나는 지상의 복을 버리고 하늘 위에 살려 하는 자임이로다.


오! 주님, 나를 이끄사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당신의 십자가를 체험하게 하시옵소서. 나는 말없이 그 잔을 마시리다.

오! 주님,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옵니까. 말라빠진 신조(信條)와 고목이 된 교리를 전하며 이것이 주님의 일이라 하여 녹(錄)을 받아먹고 살아가는 제사장의 직분을 하고 있나이다. 나는 부모와 처자와 친구와 제도와 조직의 종이 되었나이다. 저희의 종노릇을 하려고 애쓰고 있는 자식이로소이다. 그러므로 나는 주를 만나지 못하나이다.

오! 주님, 지금까지 제가 경험한 주님은 너무나 천한 주님이시었나이다. 너무나 무력한 주님이었고 너무나 비근(卑近)한 주님이었나이다. 오! 주님, 나를 긍휼히 여기사 고귀한 당신의 형상을 보게 하여주옵소서. 당신의 깊음을 체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당신의 높음, 당신의 넓음에서 당신의 사랑을 맛보게 하여주옵소서.

오! 주님,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다만 당신과 당신의 십자가 밖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불구자를 만들어 주옵소서.

오! 주님, 나는 아직까지도 사업욕에 잡히어 있사옵니다. 나를 아주 죽여주시옵소서.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다른 것은 생각도 못하는 참 병신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아멘.

1931. 5. 7 이용도 목사님의 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