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자유를 갈망함

얼마 전에 그동안 쓰던 핸드폰을 바꾸었습니다. 작동이 시원찮고 불편함이 생기면서 저렴한 공짜폰이라는 것으로 바꾼 것입니다. 십수년간 써오던 011번호가 드디어 010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쓰던 번호에 숫자 5만 더 붙여졌습니다. 기능들이 예전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참 편리한 세상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새로운 핸드폰을 익히려 불철주야로 매달리는 것입니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열고, 시험해 보고, 오류가 나면 고민하고, 너무 몰두하다 보니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머리를 싸잡고 들어 누웠습니다. 그러나 한 손엔 핸드폰이 여전이 들러붙어 있는 것입니다. 한심하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했습니다. 분이 이는 마음에 타잔이 부러워졌습니다. 헌데 그게 또 속이 상했습니다. ‘아니 사명자가 타잔이 부럽다니…’

어떤 수도사는 극성을 떠는 쥐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양이를 들여오고, 그걸 먹일 젖 염소를 사오고, 염소를 돌볼 여인을 모셔오고, 그래서 결국 그 여인과 결혼을 했다 하네요. 나 참! 그 쥐 때문에!

하지만 실상은 내 안에 들어온 이 욕망 때문입니다. 그냥 좀 불편해도 쓰면 되는 것이거늘, 다른 것은 다 그렇게 하다가도 꼭 조금 생긴 허점 한 구석으로 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꼭 에덴에서의 허점 같이 말입니다. 더구나 공짜로 더 큰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유혹 앞에 시간을 더 절약할 수 있을 거라는 명분으로 시작한 일은 익히기까지 많은 시간을 요구합니다. 겨우 다 익혀서 익숙해 지내노라면 곧 또 새로운 것이 나타나 절대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웬만큼 익힌 다음 날 서비스센터로 가서 구제품이니 마지막으로 버전 업을 하고 다시는 이것에 신경 쓰지 말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아말렉은 최후의 자리까지 발목을 잡았습니다. 업그레이드 후에 문자 기능에 심각한 오류가 생긴 겁니다. 결국 저는 다시 센터를 방문했습니다. 편리하게 하는 모든 기능들은 편리한 게 아닙니다. 결과적으론 그 편리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편리의 노예가 되게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에게 자기 소유를 다 팔라 하실 때, 소유가 많아 근심하며 돌아가는 그를 보며 “부자는 천국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교훈하셨습니다.

저는 부자도 아니면서 부자 노릇을 하는 게 속상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의 그런 탐심과 허영이 소유임을 또 다시 경험하는 것입니다. 책조차도 소유하길 거부했던 프랜시스와 작은 형제들은 얼마나 이 싸움에 용감했던가! 잘 만들어 흐뭇했던 바구니를 태우며 마음에 예수님 이외에 아무 것도 갖길 원치 않았던 성인의 청빈은 완전한 자유의 표상이었습니다.

“아멘! 주 예수님 어서 오시옵소서!”

박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