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처음 그대로이신 주님


진리의  말씀 그대로 실천하셨던 영적 스승이 계셨다. 살아계실 때 뵙지는 못했지만 늘 가깝게 느껴졌다. 그분이 남긴 삶의 발자국들과 육성 강의, 책을 통해서였다. 당시 빛이 내 안에 쏟아져 내렸을 때 그 어떤 것도 침범할 수 없는 뜨거운 열정과 큰 은혜가 넘쳤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은혜를 받아 누릴 때는 세상에 무서운 것 없이 영혼은 절정의 행복으로 날아올라 가볍게 날개를 펄럭인다. 미소를 머금은 채 이웃을 돌아보며 저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은혜의 약효가 떨어지면 마음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다. 처음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마음을 유지하고 있다면 나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 내가 속한 단체가 더 좋은 모습이었을까? 다시 처음 마음으로 뜨겁게 타오르고 싶은 것은 나만의 열망이 아닐 것이다.

영성가 십자가의 요한은 가르멜 수도사였지만 당시 부패한 사회와 수도회를 개혁하기 위해 개혁 가르멜 회를 세웠다. 자신의 삶은 물론이거니와 느슨해진 단체를 개혁해 나가기 위해 뜨겁게 불타올랐다. 그러다가 어두컴컴한 감옥에서 눈을 떴다. 꿈결 같은 날들을 보내던 중 갑작스런 시련, 완율파 가르멜 동료들이 밤에 보쌈해서 감옥에 가둬버린 것이었다. 죄명은 순명하지 않고 개혁을 시도한 불순함이었다. 부패한 단체를 새롭게 하고 스스로 개혁적 삶을 지향하려는 뜨거운 열의는 한순간 죄인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사명감도 식어졌다.

식사시간마다 식당으로 끌려가 동료들 앞에서 온갖 수모와 모멸적인 박해를 당했다. 동료들은 음식을 그의 몸에 뿌리거나 침을 뱉고 회개하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빛이라고는 들어오지 않는 감옥은 지옥과도 같았다. 먹을 것도 없었고 화장실도 따로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하나님을 찾는 것이었다.

난 바른길을 가고 있는가? 내가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아닌가? 진정 내가 틀린 것은 아닌가? 하나님, 빛을 비춰주소서. 이곳에 찾아오셔서 뜻을 보여주소서. 왜 조용하십니까? 왜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고약한 하나님 같으니라고.”

뜨거운 마음이 차갑게 꽁꽁 얼어버린 시간들을 얼마동안 보낸 후, 하나님이 손을 내미셨다. 양심에 가책을 받은 동료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그곳을 탈출하게 되었다. 그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며 열정을 회복하여 개혁 가르멜 회를 창립하였다. 썩고 악취가 나는 단체를 맑고 깨끗한 물줄기를 공급하며 그 시대 영성의 개혁가가 되었다.

새벽이 오기 전에 반드시 깊고 어두운 밤이 존재한다. 그래서 열정이 식지 않도록 각별히 노력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주님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포기했어도 순간순간 절망과 공허가 찾아올 때가 많다. 이는 아주 당연한 이치다. 고난을 당할 때는 작은 빛줄기조차 발견할 수 없지만, 어두운 터널을 통과한 후에는 예전과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며 더욱 성장해간다. 영혼의 밤이 없이는 영적 성숙에 이를 수 없다. 갈등과 번민과 고통을 통해 영혼이 닦달질 당하며 목표지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열정의 불씨를 꺼트리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마귀를 깨어 경계해야 한다. 곤란한 일들이 겹겹이 겹쳐오면 지속적으로 뜨겁게 타오르는 것은 쉽지 않으나 그 순간조차도 익은 열매라는 목표 의식을 흐리지 않아야 한다. 목표 의식이 흐려질 때 더 곁길로 빠지기 쉽고 방탕하기 쉽다. 목표 의식이 뚜렷할 때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도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맑은 물을 공급받아야 하며, 은혜의 자리를 지속적으로 찾아야 한다.

처음 그대로의 마음을 유지하는 비결은 반복되는 삶의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아야 한다. 묵묵히 인내하고 또 인내하는 그곳에 은혜의 물줄기가 부어진다. 결국 우리는 주님의 손 안에 머물러 있다. 내 모습 이대로 초라하기 그지없더라도, 뜨거운 모닥불 하나 지필 힘이 없다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이들에게 은혜는 다시 임한다. 변치 않으시고 신실하신 주님은 언제나 처음 그대로이시기에.

허윤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