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좋은 행복

우리 옥상 정원에는 고양이가 산다. 쥐가 5층 사택 천정에까지 침입했기에 여러 궁리 끝에 데려온 지킴이 담이. 생후 한 달쯤 데려온 것이라 쥐잡기는 무리인 듯해 담대하게 쥐를 잡으라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놀랍게도 쥐들은 종적을 감췄다.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담이가 크면서 외로움을 동네방네 호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나 크게 울어대는지 한 블록 떨어진 권사님 아파트까지 들렸다. 그래도 손 얹어 간절히 기도할 때면 소리가 줄었고, 수도하는 고양이라며 쓰다듬던 긍지는 옥상 문에 붙여진 쪽지 한 장에 무너졌다. “냥이 우는 소리가 너무 맘이 아파요. 친구를 데려오든지 방에서 키우든지 하셔야 될 것 같아요. 우리 아이들도 몹시 아파하네요.” 민원이 발생한 것이다.

당장 가족회의가 열렸고, 자원하지 않은 수도생활을 고양이한테 강요할 수는 없다며 여러 논의 끝에 친구를 데려오기로 결정하였고, 같은 수컷으로 하자는 데는 일치하였다, 잘못하다가는 고양이 목회를 해야 할지도 모르므로. 그런데 우리의 순진한 생각은 데려온 날 바로 무너졌다. 우는 소리는 사라졌지만, 다른 심각한 문제가 또 발생했다. 담이가 친구 단비를 자기 짝으로 착각하며 계속 귀찮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들이 단비에게 과감하게 메스를 대었고 큰 고통을 겪은 이후 소음은 사라졌다. 옥상과 이웃은 다시 평화를 찾았다. 모든 게 조용해졌다. 대립하던 둘은 이제 서로 놀며 핥아주기도 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옥상의 은혜는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다. 새벽기도를 끝내고 올라와 성경을 묵상하면 담이는 늘 하던 대로 내 무릎에 올라와 눈을 지그시 감고 경청한다. 의자 밑에서 단비가 허겁지겁 사료를 먹어대도 이 좋은 자리를 빼앗길 수 없다. 묵상이 끝나면 그제야 내려가 자기 밥을 먹는다. 단비는 묵상이란 게 금시초문인 눈치다. ‘그렇지, 어찌 감히 담이와 견줄까. 아무리 털 색깔이 아름다워도 말이야. 묵상할 때 주인의 무릎 위에 앉은 담이의 눈빛 속 행복을 알기나 할까. 단비는 아직 배울 게 많아. 그래서 수도생활로 한 해를 넘은 담이를 본받아야지, 비록 강제였어도.’

그렇게 성장한 담이는 역시 단비와 달랐다. 처음 단비가 와서 앞발로 뺨을 때려도 훨씬 더 큰 담이는 텃새를 부리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뒤를 좇아가다 단비의 기습적인 뒷발치기에 맞아도 반격하지 않았다. 그저 맞으면 물러설 뿐이다. ‘아침 묵상과 기도를 받으며 자란 담이니 먹기만 탐하는 종류와 같을 순 없지.’ 밥을 다 먹고도 단비는 늦게 먹는 담이의 밥통으로 돌진하지만 담이는 담담히 받아들인다. 식후에 단비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열심히 침 발라 세수하고 자기 털을 단장하느라 분주하다. 하지만 담이는 곧바로 다시 무릎으로 올라와 주인의 얼굴에 눈을 맞춘다. 골골대는 목젖소리는 저는 이것이 더 행복해요.’라는 뜻이다. 작은 동물에게도 교훈을 얻는다. 더 좋은 것, 더 행복한 것, 여하튼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라는 것을. 모든 애정과 욕망보다 우선적인 선택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것이 참 행복으로 가는 문이라는 사실을.

박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