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선교에서 어린양의 실재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세상과 부화뇌동하는 데 있다. 뭔가 크고 웅장한 것에 한눈을 판다. 하지만 어린양의 성질은 거대하거나 광대함에 있지 않다. 신부의 특성은 아름다움과 거룩함에 있다. 세상은 오늘날의 교회가 너무 작아서 비난하는 게 아니라 이 거룩함을 잃어버려서 외면한다. 영광은 하나님의 존재적 표현이고, 의는 하나님의 통치 방법이며 거룩은 하나님의 본성이다. 이 속성을 가지고 지상에 존재하는 곳이 교회다. 이곳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주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거처)이 된다. 교회는 만민이 거할 수 있는 넉넉한 집이다. 이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선언적 의미다.

세상 제국은 흥망성쇠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 존재에 대한 영구보존 계획이 아주 치밀하다. 창세기 11장은 이렇게 사자의 세계를 묘사한다.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성취), 우리 이름을 내고(명예), 흩어짐을 면하자(결집)”(11:4).

뭔가를 도모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항상 있었다. 인간사는 그럴싸한 합종연횡(合從連橫)이 이루어지지만 항상 그 중심에 내가 있어야 한다. ‘우리라는 그럴듯한 명분은 나의 몫을 우선 확보해 놓고 그 성취를 바탕으로 유명해지고 싶어 한다. 거기는 머리가 둘이 될 수 없어 결국 무너진다. 여기 바벨의 추구는 공세적이고, 노골적이다. 몸집을 불리는 데 있다. 덩치를 키워야 지배력을 확보하기 때문이다. 힘이 있어야 이긴다는 것은 사자(獅子)의 세계 상식이다. 교회도 여기에 편승하여, 흩어지기(선교)보다는 흩어짐을 면하기(자기 교회 중심) 위하여 온갖 방법으로 성을 쌓는다. 한국교회가 양적 성장에 도취되어 있을 때, 교회는 너도나도 덩치 키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건물, 기도원, 공원묘지 등으로 자체 성장동력을 극대화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뒤로 하드웨어는 남겼는지 모르지만, 점점 사람을 잃고 있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어린양을 보라! 그것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다. 크리스천은 예수님을 만난 자들이다. 어느 자리에서 만났느냐가 관건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만난 자들은 그를 빵의 문제를 해결해 줄 왕으로 기대한다. 기적을 경험한 후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허다한 무리를 보라! 왕으로 삼으려는 무리를 피하여 예수님은 무리의 상식과는 다르게 한적한 곳(갈릴리)에 한동안 머무셨다(7:1-5).

병을 고치는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난 자들은 예수님이 치료하시는 분이어서 그분을 따른다(6:1-2).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난 자들은 그 어떤 폭풍우도 다스리시는 분으로 의존한다. 모두가 자기들의 필요를 따라 인간의 무능을 보충해 줄 전능자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최종 자리는 십자가다. 이 십자가는 어린양의 자리다. 죽음의 자리다. 사람들은 이 자리가 싫다. 사람의 개념에서 벗어난 자리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모두 십자가에서 처형된 선생을 두고 떠난 이유가 그것이다. 번제단 없이 성소에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고, 십자가 없이 하나님의 거처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이것은 복음의 핵심이고 성서의 전체 주제다.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된다. 이것이 결론이다.

이 십자가를 비켜서서 인간의 필요를 구하고 교훈만 찾는 일은 그럴싸한 종교는 될지언정 부활생명에 이르는 길은 없다. 오직 그 안에 생명이 있다. 이것이 원초적 생명나무의 열매로 이어지는 그 길이다. 다른 길은 성인들의 가르침은 되어도 화염검을 피하여 동산에 들어가는 길은 열리지 않는다(3:24). 지금도 사람들은 이 길을 피하여 다른 길이 있나 찾고 있다. 자기가 죽어 인류를 살리는 일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뿐이다. 다른 길은 없다. 나도 살고 너도 사는 상생적 원리를 넘어, 나는 죽고 네가 사는 희생적 원리가 십자가다.

주님의 나라는 결코 힘의 제국이 아니다. 서구 기독교가 정복의 역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다스리라.”는 말을 세상의 개념으로 적용한 결과는 철저한 사자의 세계를 낳고 말았다. 그러나 생육하고 번성하면 땅에 충만하게 된다. 충만하면 생명의 세계에서는 정복된다. 정복되면 다스리는 것은 당연한 통치권의 행위로 연결된다.

나노기술(Nano Technology; NT)10억 분의 1미터인 나노미터 단위에 근접한 원자, 분자 및 초분자 정도의 작은 크기 단위에서 물질을 합성하고, 조립, 제어하며 혹은 그 성질을 측정, 규명하는 기술을 말한다. 실제로 1nm(나노미터)는 머리카락 굵기(100)10만분의 1정도, 원자 서너 개 정도의 크기에 해당한다. 물리학의 혁명으로 불리는 나노물질은 나노 크기의 먼지 입자로 인한 인체와 환경영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지만, 나노과학은 물리학의 기적이며,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보다도 더 큰 사건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처음에 브리태니커 사전 24권을 핀셋 머리 부분에 옮겨 적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은이 나노 크기로 작아지면, 다른 물질과 쉽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응용한 것이다. 가까운 장래에 인조 피부, 인조혈관, 신장에도 이용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나노기술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전혀 다른 물질이, 심지어 무생물과 생물이 하나 될 수 있는 길은 내 존재의 작아짐(나노단위까지)에 있다. 그때 비로소 어떤 물질과도 합성(연합)할 수 있어 원하는 것을 조립할 수 있다. 이것은 도저히 하나될 수 없는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자리가 가장 작아진 십자가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십자가는 나노기술과 유비(類比) 관계로 작아짐(죽음)’이 그 핵심원리다. 구약 번제단의 위치에서 표현하면 재(Ashes)로 비유된다. 사자는 내가 거대해서 남을 지배하는 힘의 상징이고, 어린양은 내가 작아져서(죽기까지) 그 무엇과도 하나되어 구원을 이루는 상징적 실재다. 실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안에서 만물은 통일된다. 이것이 복음이다.

음식은 항상 작아야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을 이기는 것은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작아져서 그 사람의 음식이 되어 들어가야 한다. 인체는 내 세포보다 작은 음식물을 영양소로 흡수한다. 입에서 씹고 녹여서 소화과정을 통해 음식의 내용이 비로소 체내 세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비타민의 중요한 기준은 입자의 크기에 있다고 한다.

이것이 엘 하나님, 전능자가 우리 인간에게 오시는 원리였고, 우리네 선교원리다. 내가 너무 커서, 잘나고, 이질적이면 사람들은 나를 먹지 못한다. 선교사가 선교지에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선교사가 작아지고 죽음으로 재가 되어 그들의 토양에 뿌려지지 않으면 열매를 기대할 수 없다. 내가 죽어 생명으로 그들과 연합되지 않는 한 이물질로 남아서 토양을 망치게 된다.

퇴비는 흙과 씨앗을 연결하고 생명을 발아시켜 열매를 거두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퇴비는 다 좋은 게 아니다. 발효되지 않은 생성질의 퇴비를 흙 속에 놓고 씨를 심으면 씨앗은 썩고 만다. 생퇴비 때문에 생명의 연합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퇴비는 충분한 숙성과정을 거쳐 자신의 생성분을 없애고 발효되어 미생물의 생활환경으로 변할 때 밭에 뿌려서 생명을 거두게 된다. 거름은 잘 썩을수록 식물의 생장을 돕는다. 썩은 것인데 성분이 다르다. 생물의 세계는 자기가 썩어서 자양분이 되어 확장한다. 기계적인 세계에서는 힘이 지배한다. 그러나 생물의 세계는 자기의 희생을 통해 남을 살린다. 강한 것은 사라지고 약한 것은 오래간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말이 여기에 있다. 겸손한 자가 지배한다.

선교도 마찬가지다. 선교사가 분해되고 발효되지 않았을 때는 오히려 선교의 독이 될 수 있다. 선교란 힘의 정복을 통한 지배가 아니라, 내가 양식이 되어 먹힘으로 그들 속에 생명력으로 남는 것이다. 부모가 양식이 되어 자식들이 성장하는 것처럼. ()

김태현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