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로 가까이

모임의 단체에서 강화의 일만위 순교성지순례를 하면서 내 영혼에 잔잔한 은혜가 임했다.

성지를 방문할 때면 14처 십자가의 길을 으레 의식처럼 걸었다. 여느 때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하려는데 함께 있던 어느 분이 한 곳을 가리켰다. 100cm 가량의 통나무로 만든 십자가들이 보이고 안내판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주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지고 함께 가봅시다. 무거워 보이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지면 충분히 지고 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져보고 싶은 간절함에 십자가를 한쪽 어깨에 지고 걷기 시작했다. 가벼울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어깨에 올리자마자 묵직함이 느껴졌다. 1분도 안되어 어깨에 통증이 왔다. ‘이런 느낌이구나. 예수님은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내가 진 십자가는 그에 비하면 정말 가벼운데.’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자연스레 침묵이 흘렀다. 한쪽 어깨에 고통을 몸소 체험하며 고통스러워하시는 예수님께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간 듯 했다. 사순절 기간에 접어들면서 평범한 일상 속에서 쳇바퀴 돌아가듯 삶을 살아가는 내 모습이 한심했었다. 주님께 특별한 어떤 것을 드릴 수 있을까 고민만 하고 결국 결정을 못했다. 금식? 절식? 어떤 것도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그렇게 사순절은 지나가고 있었다.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레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살아가면 좋으련만 나만의 생각 속에 갇혀 정작 소중한 것은 잃어버리곤 한다. 때로는 특별한 은혜를 찾다가 순간순간 주어지는 작은 십자가를 외면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단순함 속에 얻어지는 보화를 놓치기도 한다.

예수님은 지극히 단순한 생활 가운데 목수로서 30년을 보내셨다. 그러한 소박함과 침묵의 삶 끝에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육체는 물론 정신적 고통으로 지옥에 떨어지는 것 같은 캄캄한 터널을 지나셨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그토록 가혹한 십자가를 지셨던 우리 주님,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하는 치욕을 겪으셨던 우리 주님. 결코 화려하지도 선망의 대상도 아닌 십자가이건만 십자가는 신비롭다.

그 안에는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다. 사랑과 용서가 있으며 인내와 절제가 있다. 자비, 충성, 양선, 온유가 있으며 질투와 시기가 없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 동안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네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를 져라.’

십자가는 스스로가 져야 하지만, 짊어지면 주님께서 친히 함께 져주신다는 신뢰와 믿음이 늘 필요하다. 순간순간 내 쪽에서 관계를 깨버리기에 주님은 한없이 인내하신다. 어떤 설명도 없이 약속을 과감하게 깨뜨린 쪽은 발 뻗고 편안히 쉬는데, 주님은 안타까워하시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기다리신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은 끝이 없으시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일사각오 정신으로 신앙의 정절을 지키다 옥중에서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의 영문 밖의 길이라는 찬양이 마음에 스쳐간다. 주님께 아무 것도 드릴 것 없는 이 죄인, 찬양을 조용히 되뇌어 본다.

서쪽 하늘 붉은 노을 영문 밖에 비치누나/ 연약하온 두 어깨에 십자가를 생각하니/ 머리에는 가시관 몸에는 붉은 옷/ 힘없이 걸어가신 영문 밖의 길이라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걸어가신 자국마다/ 뜨거운 눈물 붉은 피 우리 위해 흘리셨네/ 눈물 없이 못가는 길 피 없이 못가는 길/ 영문 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십자가의 고개턱이 제 아무리 어려워도/ 주님 가신 길이오니 내가 어찌 못 가오랴/ 주님 제자 베드로는 거꾸로도 달렸으니/ 고생인들 못 참으며 죽음인들 못 당하랴.”

우리 주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 구름과 같은 수많은 증인들이 지고 가신 십자가. 부족하지만 그 뒤를 따라가리라. 주님과 함께 지는 십자가, 주님께로 더 가기 위한 십자가,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랑과 행복의 십자가. 더 가까이 더 가까이, 오늘도 십자가 지고 가리라.

허윤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