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기독교인의 순교 영성

c1a6b8f1_bef8c0bd4.png초대 기독교인의 순교 영성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점검하려고 한다.

사도들의 순교

바울을 제외한 다른 사도들의 행적과 종말은 극히 기록상 단편적이거나 전설적인데서 그치기 때문에 그들의 공헌을 평가하기가 힘들지만 대부분 순교한 것으로 알려진다. 야고보는 일찍이 예루살렘에서 아그립바 왕에게 피살되었고, 베드로는 국내 전도를 마친 뒤 로마 전도에 나섰으나 네로 황제에게 순교를 당했으며, 바울도 네로 황제에게 순교를 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예수님의 사촌동생 야고보는 AD 62년에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였고, 유다는 시리아에서 전도하였다고 한다. 마태는 페르시아에서 전도하였고, 도마는 인도에까지 전도하였다. 요한은 전도하다 말년에 에베소에 살며 다른 사도들 보다 가장 오래도록 목회를 하다가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시(AD81-96년)에는 밧모 섬으로 유배되어 있는 동안 계시록을 저술하였다.

초대교회 박해의 역사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박해를 받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 역사의 매우 초기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주후 41년부터 44년까지 유대의 행정장관이 된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선왕 대헤롯의 왕국을 재현시킬 생각과 유대인 신하의 호감을 사기 위하여 기독교인을 박해하였다. 이 박해로 스데반이 순교한(행7:54-60)후 잠시 평화로웠던 예루살렘 교회는 다시 소란하여졌으며, 요한의 형 야고보가 순교하였다. 그러나 이 박해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행8:2) 복음의 씨는 오히려 유대지방을 넘어 사마리아, 가이사랴, 다메섹, 안디옥, 싸이프러스 섬에까지 심어지게 되었다.

주후 64년 로마제국의 황제 네로는 로마시 방화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렸다. 이때부터 기독교는 하나의 불법적인 종교가 되었다. “그대들에게는 존재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 황제들과 로마인들의 태도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교회들은 불에 타 붕괴되었고, 성경을 포함한 신앙서적들은 압수되어 소각되었고, 예배가 금지되었다. 기독교인들은 노예로 전락하여 토목 공사장을 전전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고문과 처형이 기독교인들에게 행해졌다.

갈레리우스 통치 때는 기독교인들을 거꾸로 묶은 채 밑에서 불을 붙였고, 그들의 코와 귀를 베고, 혀를 자르고 눈을 뽑고 손과 발을 잘랐다. 녹인 납을 몸에 부은 뒤 토막을 냈다. 그리고는 종종 매장을 하지 않고 그대로 두어 개들과 독수리들의 밥이 되게 했다. 기독교인들은 사회의 파괴자들로 오해받았기 때문에 아무런 법령의 공포가 없이도 체포할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은 불안과 공포의 시기에 새 공동체인 기독교는 묵시적 종말사상을 갖게 되었으며, 이 기간에 신약성서가 기록되었다.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313년 밀란 칙령(Edict of Milan)이 발표되기까지 계속되었다.

기독교 박해의 요인들

제2세기에 기독교의 상황은 안으로는 다양한 사상의 영향으로 교회의 방향 정립에 어려움을 주었으며, 밖으로는 기독교가 잘못 소개되었다. 또 로마 제국과의 충돌에서 박해를 심하게 받게 되었다. 교회 안의 문제에 주로 관심을 갖고 이에 대처해 간 사람들을 교부들이라 했고, 교회 밖에서 오는 도전에 대해 교회의 입장을 알리는 사람들을 변증가들이라고 했는데, 기독교가 제 2세기에 밖으로부터 충격을 받은 것은 대개 세 가지 차원에서였다.

첫째는 정치적인 차원이다. 로마제국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의해서 종교정책에도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관대했다고 할 수 있는데, 만신전(Pantheon)이 있어서 그곳에서는 다양한 여러 신들을 섬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로마 황제를 신으로 숭배해야 한다는 전제조건하에 가능한 것이었다.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에, 반국가적인 기독교인들은 결국 박해를 받게 된 것이다.

둘째는 일반 사회 시민들로부터 받은 두 가지 오해이다.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주인과 종이 함께 또한 남녀가 함께 주로 비밀 집회 장소로 지하 공동묘지 카타콤 등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밤마다 남녀가 혼숙하며 무질서한 행동을 한다고 오해하였다. 성찬식의 내용을 잘 모르고 기독교인들이 사람을 죽여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고 생각하였다. 심지어는 기독교인들이 모여 어린 아이에게 밀가루로 반죽을 하여 온 몸을 싼 후, 아이를 칼로 베어 그 피를 마신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셋째는 희랍 철학자들의 공격이었다. 그 대표자는 켈수스라는 철학자였는데, 당시 철학자들은 성서는 지극히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무식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책이라고 비난하였다. 성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탄생을 비롯한 수많은 기적들은 그들의 이성으로는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일사각오의 순교정신

속사도들 가운데서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로마로 끌려가면서 “칼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하나님께 가까이 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었다. 그는 복음이 가르치는 구원과 내세를 너무나 확실히 믿었기 때문에 한번은 대적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이 모든 것이 허울뿐인 거짓이라면 왜 내가 결박되어 있겠습니까? 왜 내 자신을 죽음과 불과 칼과 맹수의 입에 내주겠습니까?” 또한 로마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불과 십자가 앞에서도, 맹수 떼 앞에서도, 뼈가 으스러지고 사지가 절단되는 고통 앞에서도, 온 몸이 산산조각 나는 아픔 앞에서도, 마귀가 가하는 모든 사악한 고뇌 앞에서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즐거워하리라”고 썼다. 그는 안디옥에서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된 뒤 콜로세움에서 사자들에게 던져졌다. 로마제국의 황제 트라얀(Tranus, 98-117) 통치 기간에 순교했다.

이그나티우스의 글을 받은 바 있는 서머나의 감독 폴리갑은 안토니어스 피어스 황제 통치기간(138-161)에 순교를 당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마지막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 행정관이 폴리갑의 인격과 연로함을 보고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희생제물을 바치면 죄를 용서하고 석방시켜 주겠다고 제의를 하였다. 그러자 그 행정관에게 “나는 86년간이나 그분을 섬기었으나, 그분은 나에게 아무런 해도 주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한 내 왕을 비난할 수 있겠느냐?”고 하여 결국 화형에 처해졌다. 타는 불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 저 같은 것을 순교자의 반열에 서게 해 주시고, 예수님의 고난의 잔에 참여시켜 주시는 이 날을 감사 찬송 드리나이다.”하고 기도했다. 이때 이상한 것은 불길이 폴리갑의 몸을 태우지 않고 좌우로 갈려 그의 몸을 보호하는 듯 했다. 놀란 병사 한 사람이 창으로 그의 몸을 찌르니 피가 비 오듯 흘러 불을 꺼뜨리고 거룩하게 순교하셨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마20:28) 원수까지도 사랑하시며 십자가 위해서 순교하신 모습을 본받아,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갖은 박해 속에서도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고 천국을 소망하며 평화와 기쁨을 간직한 채 거룩하게 순교하였다. 초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생명과 맞바꾼 순교적인 영성을 소유한다는 의미였다.

이들의 이 순교의 영성은 “평안하다 안전하다”(살전5:3)고 외치며 자만하고 나태한 신앙 속에 빠져있는 우리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그들의 순교의 영성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수많은 죄악의 유혹과 적그리스도의 위험 혹에서도(요일2:18) 믿음의 정절을 잘 지켜야 한다고 간절히 외치고 있다.